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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Apr 28. 2024

24.04.28 거짓말처럼 화가 누그러졌다.

가진 게 나 밖에 없어서요.

#1.

요즘 진수가 똥을 잘 누지 못한다. 실외배변인데다가 원채 까다롭고 정말 완벽한 응가 플레이스를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탐색하는 터라 원래도 산책을 나가면 배변에 성공하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인데,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는 똥을 눌 자리가 마땅치 않다. 

적당히 푹신하고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 그리고 나무 둥치가 등 뒤를 지켜주거나 수풀 속에 있어서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이어야 하는데 서울엔 그런 곳이 잘 없더라. 다행히도 집 뒤에 작은 뒷산과 공원이 있어서 거기서 배변을 해결하곤 하는데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올 때면 속이 터질 것만 같다. 얘가 빨리 응가를 해야 하는데. 나는 빨리 똥을 누이고 집으로 가고 싶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 났는데, 진수는 곧 응가를 눌 것 처럼 자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돌다가 말고 돌다가 말고 할 때면 정말 화가 난다. 아무데나 싸지 좀. 다 똑같은 땅인데 뭐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이 놈 새끼. 그런데 어젯 밤 응가를 누이는 데 실패한 산책을 하고 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와서는 나도 모르게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진수야, 왜 응가 안해서 아빠 나쁜 사람 만들어?"


주변에서 하도 진수를 잘 보라고 닥달을 하니 나도 모르게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게 화가 났나보다. 아무런 죄 없는 애꿎은 진수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나는 걱정을 빙자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들이 정말 듣기 싫다.


#2.

오늘도 오전에 겨우 진수 똥을 누이고 사람이 붐비는 산책길을 안간힘을 다해서 가고 있었다. 풀 냄새를 맡으면 화가 풀리는 내 장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지쳤고 곤두서있었다. 그렇게 오르막 내리막을 걷던 나는 벤치가 보이자 마자 주저 앉았는데, 뒤에 천천히 걸어 오시던 한 분이 옆 벤치에 앉으셨다.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나는 요즘 툭하면 마음 속으로 외는 주문을 외면서 애써 그 분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대화를 했다. 그 분은 여기가 원래 다 논 밭이었고 19년동안 강아지를 키우다가 먼저 보내셨다고 했다. 강아지는 경련을 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불치병이 있었는데 실컷 뛰고 산책하니까 그 병이 나았다고 했다. 그분은 어디로 산책을 하면 좋은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화가 누그러졌다. 사실은 관심이 필요했던 걸까. 삐딱선을 타기로 한 마음이 더 이상 삐딱하게 굴지 않고 고분고분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진수에게 다시 눈을 맞추고 집에가자고 했다. 오는 길에도 역시 사람들이 붐볐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희안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다정함 덕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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