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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Mar 27. 2024

살인을 저지르고도 악이라 부르지 않는 표현 방법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 및 리뷰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줄거리


한 산골마을. 주인공 타쿠미는 어린 딸 하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마을의 심부름꾼을 자처한다. 장작이 필요한 곳에 장작을 패 가져다주고 물을 길어다 주는 수고스러운 일까지 자청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건망증. 그는 어린 딸을 귀가시키기 위해 학교에 가야 하지만 자주 그 사실을 잊는다. 다행히 하나는 똑똑한 아이였다. 혼자서도 집을 찾아오는 일 정도는 거뜬하다. 이날도 타쿠미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 하나는 산길을 지나 집으로 온다. 아버지와 중간에 만나긴 해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을 개발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예 기획사 플레이모드의 직원이자 글램핑장 건설 추진에 담당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말이다. 그들은 설명회를 열어 강 상류에 있는 이 마을에 글램핑장을 만들면 수익사업의 기회도 늘어나고 마을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글램핑 이용자가 만들어내는 오폐수 문제, 소음 문제 등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따져 묻는다. 이들은 이에 대해 우물쭈물 말을 삼킬 뿐이다. 분노한 주민들은 하나 둘 언성을 높이고 첫 설명회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설명회가 끝나고 이들에게 마을회장이 타쿠미의 연락처를 받아서 그와 소통을 하라는 조언을 한다.


도쿄로 돌아온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사장에게 보고를 했지만 그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코로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사업을 벌여야 했으므로 다시 한번 가서 그들을 설득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다시 마을로 향한다. 장작은 패던 타쿠미는 친절하게 이들을 대해준다. 마을을 돌며 이런저런 답을 해주던 그는 하나를 데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서둘러 학교를 향했지만 하나는 이미 혼자 떠났다는 선생님. 산골 마을에 어둠은 금세 찾아온다. 날이 어두워지자 온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하나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유즈미는 다쳐 집을 지켜야 했다.


모든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하나를 찾고 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온 어느 시각. 멀리서 하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맞은편에 상처 입은 사슴이 보인다. 총상을 당한 아기 사슴,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부모 사슴. 타카하시는 서둘러 하나를 향해 뛰어가지만 웬일인지 타쿠미는 그런 타카하시를 뜯어말린다. 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격하게 그를 저지한다.


뻔한 주제 의식의 이야기를 넘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젊은 나이지만 이미 평론가와 관객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뛰어난 감독이다. 그는 일상 속 벌어지는 사건을 주제로 각본을 쓰는데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아주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다. 산골 마을의 관광지 개발이라는 이야기. 관광지가 개발되면 수익을 올릴 수도 있으나 반대로 자연산림이 훼손될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주제라는 제약은 하마구치 류스케에게는 별 어려움을 주지 못했다. 그는 이 뻔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심지어 며칠간 벌어지는 짧은 사건의 제약마저 가뿐히 넘어선다.


이야기는 언뜻 보면 지역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싶어 하는 자본가와 마을의 전통과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원주민과의 대립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들의 태도를 통해 보여진다. 원주민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지 않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을 제기해 이 개발이 과연 마을의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알고 싶어 한다. 자본가 역시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싶어 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이들이 원하는 건 코로나 지원금이지 이 사업의 실현 가능성과 수익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특히나 마을회장은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리는 자연 보호니 뭐니 하는
거창한 목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알량한 도덕심을 강조하지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제법 유연한 태도로 설명회에 참여한다. 이들이 바라는 건 플레이모드라는 회사의 진정한 의도다. 그들이 지원금이 목표였을지라도 진심으로 마을을 위했다면 기꺼이 협조했으리라 생각한다. 어수룩한 시골 사람을 속여넘기는 게 쉬운 일이라 생각해서인지 이들은 그 정도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회장이 꿰뚫어 본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이들이 얕은수를 써서 마을을 훼손하려 했기 때문에.


자연 보호 역시 중요한 문제긴 하다. 물맛을 찾아 도쿄를 떠나 4년 전 이 마을로 이주한 우동집 부부에게는, 그리고 하류 사람들 역시 식수로 사용하는 주요 수원지인 이곳을 지키는 건 사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주민들에게 이 문제는 다음 문제다. 자연이 훼손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고 확실한 청사진을 제안했다면 이들은 계산적으로 거래를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산골 마을 사람들의 무기는 진실함이다. 이들은 불쾌한 감정을 애써 누르려고 하지도, 마음속없는 겉치레로 이들을 달래주지도 않는다. 그들이 협상장에서 원했던 건 플레이모드 사람들 역시 진실한 것이었다. 제대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건 이들의 얕은 눈속임으로는 진실 속에 살아온 주민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류와 하류, 뒤집히고 뒤집는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상류와 하류다. 상류와 하류라는 말의 이미지에서도 느낄 수 있듯 이 단어는 계급 차이, 즉 자본가와 비자본가의 구분을 짓는 하나의 요소로 사용된다. 당연히도 이야기 속 상류는 도쿄의 플레이모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설명회 때 고압적인 자세로 주민들을 대한다. 시골 마을 사람들의 재산 수준, 지적 수준이 당연히도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 안일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화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재산 수준이 하류였을지는 몰라도 지적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고등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그리고 자연과 자본의 균형에 대해서는 도쿄 사람들보다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선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박의 의문을 쏘아댔고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제대로 된 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이들은 본사에서는 철저한 '하류 인간'이었다. 불합리한 본사의 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다. 이들은 플레이모드라는 거대한 악의 수발일 뿐 어떤 사고를 하거나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사장이 없는 자리에서 회사 일의 부당함을 토해내는 것 정도다. 그곳에서는 잠시 상류 사람들처럼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 경력을 뽐내기도 하지만 이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 역학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사장이 지시해 다시 타쿠미의 마을로 내려간 뒤의 대화에서다. 이들은 지저분한 소문으로 유명한 엔터계를 자청해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해오던 일이 이것뿐이라, 조금 더 타락해 보고 싶은 찰나여서 등의 이유로 발을 담갔을 뿐인데 생각보다 깊게 물이 차오른 것뿐 이들이 정말 이 일에 보람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은 하류 중의 하류였다. 더럽혀지고 볼품없는. 이들이 상류로 올라설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이 회사를 떠나는 일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일을 떠나려 한다. 마유즈미는 이번 일을 마지막을 퇴사하기로, 타카하시는 글램핑장 관리직에 지원함으로써. 이들은 거대한 급류에 쓸려 다니는 소시민이었다. 한 번도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먹이사슬 최약체의 인물. 순진한 시골 사람들 머리 위에 서서 그들을 부려보려 했던 호가호위의 여우. 그들은 하류 인간을 벗어나 상류에 다시 한번 서고자 한다. 그 상류의 물이 얼마나 깊고 맑을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휩쓸려 가지 않고 내가 만드는 주도적 인생을 꿈꿨던 것이다.


아버지와 딸, 부모 사슴과 아기 사슴


영화 결말에 이르러 실종된 딸을 찾는 타쿠미는 총에 맞은 사슴 한 쌍도 발견한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마주한 하나와 사슴이 담긴 앵글은 앞서 그들이 했던 이야기 때문에 더 큰 불안감을 조성한다. 글램핑장을 만들면 사슴이 넘어와 인간을 공격하지 않냐는 말에 타쿠미는 야생 사슴을 겁이 많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제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단 한순간은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다쳤거나 자신의 아이가 다쳤을 경우 그들은 공격할 수 있습니다. 라고. 자신이 다쳤다면 어차피 살아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다쳤다면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즉 하나가 겁 없이 사슴 앞에 서서 모자를 씌워주려 하는 행동은 굉장히 위험하고 무모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기 사슴은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알기에 하나를 공격할 수 있다. 부모 사슴 역시 자신의 아이가 다쳤으므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이는 하나에게 놓여진 위험, 더 나아가 불운한 결말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한 발 더 나아가 사슴 한 쌍은 이들 부녀에게도 곧바로 대입된다. 사슴에게 습격당해 상처받은 딸과 지켜보는 아버지. 이들은 모두 공격성을 띨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다만 딸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만큼 누군가를 해할 수 없겠으나 멀찍이 지켜보던 아버지는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던 결말 부분 타쿠미의 행동을 이해할 때 단서가 된다.


타쿠미의 행동과 타카하시의 행동


사슴과 부녀의 평행이론은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과도하게 제압한 사건과도 연결된다. 사슴을 각각 부녀에 대입한다면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은 두 사람 외의 인물이라는 의미가 된다. 사슴의 경우 먼발치에서 총격을 한 사냥꾼이 아기 사슴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들은 자신을 다치게 한 사냥꾼 대신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어린 하나를 공격한다. 부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공격한 건 한 쌍의 사슴이다.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 할 것 같지만 타쿠미가 물리력을 행사한 건 타카하시였다. 타카하시 역시 하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가던 인물이다. 사슴의 경우 희생되었던 하나가 아기 사슴에게 모자를 씌워주려 했다는 점을 볼 때, 이는 그의 불행한 운명을 점지하고 있었다.


즉 이 두 가지 사건은 병렬 구조로 완전히 같게 설계되어 있다. 영역 밖 외부 요인으로 인한 공격, 어린아이의 죽음, 새끼를 잃은 아버지의 분노. 그 속에서 진짜 복수 받아야 할 대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앵글 밖 어딘가에 숨어 있다. 대신에 앵글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갈 곳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이 과정에서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고 마는 것이다.


타카하시의 죽음이 이해할 수 없듯 하나의 죽음도 쉽게 이해될 수 없다. 다만 그 주체가 사슴이냐 인간이냐에 따라 관객은 다른 잣대를 들이민다. 하나를 죽인 건 사슴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끄덕이지만 타카하시를 죽이는 타쿠미를 보며 어째서 사람을 죽이지?라는 의문을 갖는다. 이 의문은 인간의 도덕성을 사슴보다 훨씬 우월하게 보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인 완전히 같은 사건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타쿠미의 행동은 복수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발작 증세로 이해됐다. 물론 타카하시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죽음 역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고 했던 행동에 대한 어떤 형태의 처벌,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커다란 영역에서 볼 때 생명이 생명을 죽인 같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살인이라는 무거운 해석을 하기보다는 충격적인 일을 목격한 작은 생명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패턴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악은 존재하지 않을까?


독특한 제목의 작품답게 제목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제목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강렬하다. 파란색 글씨와 빨간색 글씨로 'Evil Does Not Exist' 크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붉은색으로 표시된 Not의 존재감을 지워낼 방법이 없다.


붉은색은 강조의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부정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즉 붉은색을 생략하고 본다면 악은 존재한다.라는 확언적인 메시지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도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악으로 묘사될 만한 존재들이 여럿 등장한다. 주민들은 무시한 채 지원금을 위해 글램핑장 개설을 서두르는 플레이모드 회사 사람들, 유희거리로 사슴을 사냥하는 사냥꾼들, 그리고 명쾌하지 않은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 타쿠미까지. 어떤 기준을 두고 보느냐에 따르지만 악으로 구분될 사람들이다.


하지만 제목은 결국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이들의 행동이 정의롭다고는 볼 수 없어도 이를 악으로 보기는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플레이모드 회사 사장은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비열한 인물이다. 하지만 코로나 지원금을 타내는 일이 불법이 아닌 편법이라면 그를 악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심심풀이로 사슴을 죽인 사냥꾼 역시 의로운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허가된 총기로 허용된 장소에서 사냥을 하는 걸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타쿠미에게도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 자신의 딸을 구하려고 뜀박질을 했던 타카하시를 죽인 타쿠미에게도. 그에게 주어질 면죄부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자연의 모습과 생태계의 큰 틀에서의 순환일 것이다. 커다란 생태계에서 먹고 먹히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앞서 사슴과 인간의 병렬 구조에서 봤듯 하나의 사건이고 이 자연 현상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즉 그의 살인은 '살인'으로 보아선 안 되며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는 균형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 결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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