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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빛이 아닌 그림자를 좇는 방법

영화 <하얼빈> 리뷰

by 로튼애플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하얼빈은 호불호를 많이 탄다?

시기상으로는 2024년에 개봉한 영화지만 해가 지나고 나서야 이 작품을 관람했다. 한국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나에겐 이 영화 역시 큰 기대감은 없었다. 손익분기점이 굉장히 높은 영화, 안중근의 생애를 다룬 영화.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어떤 정보도 없이 영화를 고르고 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미있었다. 이 작품이 그려내는 다양한 장면들과 절묘하게 깔리는 음악들, 배우들의 열연.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은 보는 내내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호평일색이라기보다 상반되는 의견이 양립하는 모양새다.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네이버 관람객 평점이 이 글을 쓰는 시간을 기준으로 7.37점, CGV 골든에그 지수는 89%다. 아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는 한국 영화들이 9점 이상의 네이버 평점을 받고, 95% 이상의 골든에그 지수를 받는다는 걸 감안하면 그리 높지는 않다. 약 1년 전쯤 개봉하여 큰 흥행을 했던 영화 <서울의 봄>이 네이버 관람객 평점 9.48, CGV 골든에그 지수 98%를 기록했다는 걸 보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하얼빈>의 흥행 전선에는 이상이 없다. 1월 1일,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이라 했던 650만 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물론 어수선한 국내의 사건 사고들 탓에 예매율이 조금 꺾인 부분도 있으나 경쟁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 크게 없는 상황에서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거나 그에 준하는 흥행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는 왜 이렇게 호불호를 타게 되는 걸까?


영웅 안중근이 아닌 인간 안중근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투쟁을 그린 작품은 등장인물이 대단한 능력을 갖춘 것처럼 나오기 마련이다.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거의 전부가 슈퍼 히어로처럼 등장하여 일본군을 때려잡았고, <봉오동 전투>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일기토를 벌이며 혈혈단신으로 일본군을 무참히 쳐부순다.


이런 연출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중들이 열광했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민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리 일본과 문화 수교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의 문화를,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지만 식민 지배의 피해자였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 저질렀던 과거의 만행까지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장르에 비해 식민지 시대를 다룬 작품들은 초인적인 독립군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것이 설령 사실과 배치되는 장면일지라도. 아마 이 작품에 호불호의 영역은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웅 안중근이 일본군을 무자비하게 베고 살육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자 했던 관객들이 실망하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안중근은 실패를 하고 도망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며 괴로워하는 중간에 몸을 웅크리고 간신히 추위를 피하는 연약한 사람으로. 이는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고, 역사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내용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매사에 대범하게 행동하고 독립 투쟁을 위해서라면 늘 호기롭게 행동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안중근일지라도 위인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 목숨 하나뿐인 사람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지난 실수에 아파하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약한 모습의 안중근은 우리로선 처음 접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인간으로서 안중근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실패를 모르는 대한민국 참모중장 안중근을 너무 나약하게 그렸다는 반대 의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대단한 업적을 지닌 위인을 평가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환상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신격화하곤 한다. 마치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고,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전투를 벌였을 거라고 오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는 이순신 장군 역시 난중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절히 토해내기도 했다. 피부 가죽 한 꺼풀을 벗겨내면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이 작품은 위인에게 흠집을 내고 음해하려는 작품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다.

최고 수준의 촬영으로 끌어올린 연출

작품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아 마땅한 부분은 촬영일 것이다. 영화팬에겐 이미 널리 알려진 홍경표 촬영 감독이 촬영을 맡았는데 <하얼빈>은 그의 수많은 대표작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대표작으로 소개할 만한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할 정도의 수준 높은 촬영이었다. (영화의 완성도가 아닌 촬영의 완성도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두운 배경 아래 인물들을 추적한다. 특히나 처음 독립군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은 가히 한국 영화 최고의 촬영이라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다음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이들에게 허락된 건 작은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약간의 자연광이다. 이 자연광은 등장인물의 실루엣을 그려주고 담배 연기가 번지는 걸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밝은 조명 아래 색을 묘사하는 건 쉬운 일이다. 미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원하는 조명을 설치함으로써 적절한 색을 구현해 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히 제한되는 광원을 이용하여 어두움의 여러 단계를 표현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좋은 성능의 카메라가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촬영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나 섬세하게 검정색과 검정색의 차이를 묘사한 작품의 촬영은 아주 큰 박수를 받아야 할 부분이었다.


이외에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는 안중근,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엄여인, 무기 조달을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독립투사들. 흔히 말하는 아트 버스트 영화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가 영화 곳곳에 있어 스토리는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담아내려고 했던 장면들의 아름다움 하나만으로도 영화관에서 봐야 할 이유가 생기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뱀에 다리를 다는 자는 누구인가?

대체로 영화는 훌륭한 흐름이었다. 안중근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제시 역시 신선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어 좋았고 역사를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의 고질병 중 하나인 지나친 신파를 지양한 것 역시 영화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던 여백이 되었다.


아쉬웠던 부분은 마적으로 전락한 박점출을 만나러 만주로 가는 장면이었다. 분명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웠던 장면이기는 하나 영화의 흐름상 거추장스러운 이야기의 덧붙임이었다. 박점출이 보여준 러시안룰렛의 강렬함이나, 눈을 잃고 괴로워하는 전 독립군의 인간적 고뇌는 충분히 이해되긴 하나 극의 흐름상 불필요하게 추가되어 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기 위해 폭탄을 제공받기 위해 박점출이란 사람은 꼭 나왔어야 했을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사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나친 화면의 전환이 그 장면 앞, 뒤로 붙은 장면과 섞이지 못하는 이질감이 더 도드라졌다.


이는 마치 뱀의 발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사족(蛇足)이라는 것은 불필요하게 덧붙여 일을 그르치는 걸 이야기한다. 해당 장면 없어도 뛰어난 영화가 엉성하게 덧칠한 한 장면 때문에 일순간 긴장감이 풀어져 버리고 만다. 정우성이라는 스타 캐스팅을 과시하기 위한 장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매력 없는 장면으로 귀중한 러닝타임을 소모할 뿐이었다.


이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면서 음악 소리를 극적으로 키움으로써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버린다. 앞서 이야기했던 장점인 신파의 지양이 이 부분에서만큼은 예외였다. 거사를 앞두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독립군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겠지만 이렇게나 맥락 없는 필름 스코어의 난입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참아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하얼빈은 좋은 영화였을까?

장점과 단점을 번갈아 나열하다 보니 <하얼빈>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얼빈은 충분히 좋은 영화다. 단점을 잡아내려고 하면 충분히 단점이 잡히는 영화지만 그 단점을 뛰어넘는 장점이 있는 영화였다.


촬영은 한 챕터를 할애해 칭찬한 만큼 덧붙일 것이 없고, 조금 커서 불만이었던 그 장면만 제외하면 영화 내에 깔리는 스코어도 수준급이다.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 연기와 치밀하게 작전으로 나아가는 플롯의 탄탄함 역시 작품에 큰 뼈대를 잡아주고 있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두만강을 건너는 안중근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의 장면의 오버랩이다. 정확히는 두 장면이 오버랩되는 씬은 영화 내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친 안중근이 얼어버린 두만강 위에 쓰러져 괴로워하는 장면과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 당해 쓰러져 죽는 장면은 모두 하늘에서 찍어 누른 장면으로 촬영된다.


두 사람은 모두 각각의 나라에서 지위가 있는 대단한 인물이었고 한반도의 식민지를 둘러싸고 각기의 진영에서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비슷한 앵글로 비슷한 모습으로 쓰러지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이들 앞에 놓인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어온 안중근은 요인 암살이라는 최대의 목표를 달성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안전을 과신하다 안중근의 총탄에 맞고 최후를 맞는다.


비슷하게 연출된 장면에서 정반대의 결말을 맞이한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이 영화는 안중근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위인이 되었는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러기 위해 억지 감동 유발 장면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인간에서 독립투사로 깨어나는 안중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뿐이다.


더 이상 한국 관객들도 억지 신파에 눈물을 쏟고 좋은 평점을 매기지 않는다. 좋은 외국 영화도 영화제나 영화관이 아닌 안방 OTT로 접근할 수 있고, 유튜브나 타 SNS를 통해 정보를 접하는 게 어렵지 않아 졌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성공 방식을 좇는 게 아니라 개성 넘치는 이야기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영화감독의 이야기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조금 성기게 조립된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가 진실되고 어떤 것을 답습하지 않는 것이라면 완벽하지 않은 그 과정마저 사랑스럽게 보인다.


물론 <하얼빈>은 그 결과물 자체도 훌륭했다. 지금 당장 박한 평가를 내린 관람객 역시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 다시 이 작품을, 혹은 이 작품을 보고 달라진 한국 영화를 접하게 된다면 그때는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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