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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만 들고 있다면 결코 볼 수 없을 풍경

미야케 쇼 영화 <와일드 투어> 줄거리 및 리뷰

by 로튼애플

2025년 시점,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감독이 누굴까? 이 질문을 받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아주 시대를 거슬러 올라 명장 반열에서 언급되는 몇몇 감독(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등)을 제외하더라도 꽤 많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다니며 전 세계 평단과 관객에게 모두 큰 찬사를 받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첫 손에 꼽힐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조연출을 맡았던 바 있고 디즈니플러스 <간니발> 시리즈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린 가타야마 신조 감독도 언급될 만한 감독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연출한 <실종>이라는 영화는 2010년대 이후 제작된 일본 영화로 한정 짓는다면 한 손에 꼽을 좋은 스릴러 작품이다.


이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할 감독이 하나 더 있다. 반복되는 일상 속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섬세함을 표현하는 감독, 아날로그적 촬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독특한 향수에 젖게 하는 감독인 미야케 쇼가 말이다. 키네마 준보에서 꼽은 2024년 최고의 영화로 <새벽의 모든>이 꼽힌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장편 데뷔작부터 쌓아 올린 모든 작품의 퀄리티를 볼 때 하마구치 류스케 다음에 미야케 쇼 감독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부터 가장 최근작인 <새벽의 모든>까지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세 편을 모두 저의 채널에서 다룬 바 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다음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가장 최근에 국내 개봉을 한 영화가 있다. 점점 커져가는 그의 명성에 맞춰 뒤늦게나마 개봉하는 영화가 된 것이라 봐야겠다. 야마구치현의 중고생과 협업하여 제작한 영화 <와일드 투어>가 그 작품이다.


첫사랑은 항상 실패한다?


영화에서 주연이라고 볼 수 있는 건 크게 세 명이다. 야마구치 DNA 도감 워크숍 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맡은 대학생 인턴 우메. 그런 그녀와 같은 조로 활동하게 되는 중학생 타케와 슌.


이들은 학원 수업이 없는 일요일을 이용해 야마구치현에서 자생하는 식물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산으로,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모험은 즐거운 일들이 많았지만 어려움 역시 가득했고 그런 문제들을 헤쳐 나가며 이들에겐 묘한 감정이 싹튼다.


먼저 중학교 3학년이던 타케와 슌은 대학생 누나인 우메를 좋아하게 된다. 항상 밝은 얼굴로 그들을 맞아주는, 그리고 살뜰하게 돌봐주는 우메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메에게 먼저 호감을 느낀 건 타케일 것이다. 슌보다 먼저 프로그램에 참여한 그는 친절한 우메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가 인턴으로 있는 센터를 찾아가는가 하면, 무심한 듯 칭찬을 던지며 자신이 가진 호감을 언뜻 내비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절친한 친구인 슌이 타케를 보러 왔다가 얼떨결에 프로그램을 같이 하게 되고 그 역시 우메에게 반하고 만다. 우메가 보이는 친절이, 무해한 웃음이 사춘기 소년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이라 봐야겠다.


사람마다 시기는 다르겠지만 아마도 이 나이쯤 처음으로 호감 가는 이성이 생길 것이다. 흔히 말하는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사춘기 시절을 지나며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해지니 말이다. 타케와 슌에게는 우메가 첫사랑이라 봐야 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커다란 벽이 있다. 아직 중학생인 이들과 벌써 대학생인 우메. 사랑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처한 환경이, 삶의 패턴이, 미성년과 성년이라는 차이가 너무 크게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백을 하려 한다.


슌이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 고백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마음이 급해진 타케가 서툰 고백을 하는데 이는 완곡한 거절로 돌아온다. 그리고 슌은 고백을 하기도 전에 우메가 미국으로 떠나며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럼 이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던 우메는 첫사랑부터 성공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함께 아트센터에서 근무하던 전 남자친구와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용기를 내 다시 만나볼 생각이 없는지 고백을 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전 남자친구의 거절.


이 거절을 지켜본 슌이 자신과 우메가 이어질 수 있으리란 상상을 하게 되며 고백 계획을 타케한테 털어놓는 계기가 되고, 그 이야기에 급해진 타케가 우메한테 고백을 하는 이야기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타케와 슌의 고백 전에 우메의 고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트리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발사된 총알은 그 누구의 마음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비행하다 에너지가 다하며 바닥으로 추락할 뿐이었다.


첫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증명되지 않는 속설이 또 한 번 증명되는 장면을 연출하며 이들의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이 어떤 연쇄과정을 거쳐 발현되는지, 그리고 그 순수한 마음이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영화는 아주 밀도 있게 보여주었다.


일상 속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


중요한 소재가 되는 건 식물 DNA 채집이다. 이들은 이름 모를 식물을 발견하고, DNA 정보를 수집하는 프로그램의 참가자로서 아트센터에 모인다. 그리고 휴일을 이용해 이곳저곳을 돌며 샘플을 모은다.


이들이 찾은 다양한 샘플 중 대다수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물론 남들이 찾지 않았을 것 같은 식물 DNA를 채집하기 위해 먼 곳까지 이동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강변에 피어있는, 혹은 마을 뒷산에 자라는 식물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다양한 식물들의 이름과 DNA를 자연스레 익히며 전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던 것들, 일상이라는 이유로 대충 압축하여 치워 둔 아름다움의 진상을 이들은 조금씩 펴볼 기회를 맞이한다.


이것은 식물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어쩌면 다시 사랑 이야기로 회귀하고 만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몰랐던 친구에 대한 감정,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누나에게 순식간에 타오른 애정, 그리고 한 사람을 동시에 좋아하며 친한 친구 사이에서 느껴지던 묘한 긴장감까지.


언뜻 식물을 채집하는 학구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나 싶지만 그 속에서는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전에도 있었고 생겨났을 감정이지만 이들은 상황을 보는 자리를 바꿈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하게 확장함으로써 주변에 놓인 아름다움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은 너무 가까이 있어 제대로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독한 원시(遠視)인 것이다. 그 당연한 이치를 영화는 은유를 통해, 그리고 직관적인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흘러가게 한다.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함을


작품 속 이야기의 시점은 겨울로 시작해 봄에 다다르고 나서야 끝을 맺는다. 이들에게 놓인 겨울이란 계절은 춥고 어두운 시기일 수도 있다. DNA 채집이 한창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을 쉽사리 관측하기 어렵지만 이들에게는 분명 밝은 모습 뒤에 숨긴 그림자 역시 느껴진다.


중학생이던 타케와 슌은 큰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공부량에서나 시기적인 중요도나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이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기에 가벼이 치부될 수 있으나 토요일까지 학원을 빠질 수 없다는 슌의 이야기에서 이들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우메 역시 격동의 시기를 보낸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한테 재결합을 거절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타케한테 고백을 받는다. 이때 그녀는 거절의 이유로 미국 유학을 든다. 이 거절의 이유가 거짓은 아닌 게 새 학기가 시작되고 슌이 찾아갔을 때 우메는 미국 유학을 떠난 다음이었다.


우메가 전 남자친구한테 고백을 한 그 시점에 그녀는 일본에서의 삶과 미국 유학을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남고 싶은 얄팍한 마음이 전 남자친구한테 재결합을 제안하는 데까지 이어졌을 터. 하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그녀에게 선을 긋는다.


그녀가 쉽사리 유학을 선택하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다. 막연한 두려움이었을 수도 있고, 생활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여러 친구들과 단절이 된다는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갈팡질팡했던 우메였지만 겨울을 지나 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그녀는 제대로 마음을 먹는다. 그렇기에 타케의 진지한 고백도 확실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 테다.


저마다 겨울이라는 시기에는 고민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아름답게까지 보였을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썰렁한 기온이, 척박한 토양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봄이라는 계절은 엇갈린 마음과 두려움의 시기를 지나 이들이 희망의 땅에 도달하게 될 것임을, 차가운 겨울이라는 계절을 이겨내고 저마다의 꽃을 피워낼 것임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가장 잘 찾아내는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뻔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적절히 비틀고 새롭게 다듬어 신선한 느낌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였음에도 큰 울림을 주는 건 새로움이 아닌 익숙함에서도 충분히 인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중학생 아이들의 현실 인식과 서툰 고백, 그들을 바라보는 대학생 인턴들의 따스한 시선, 그리고 이 모두를 감싸주는 포용력 있는 어른의 모습까지. 어떻게 보면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경험하고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이지만, 반대로 이토록 아름답고 포근한 이야기는 현실에서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판타지에 가깝기도 하다. 미야케 쇼 감독은 그 판타지 이야기를 익숙한 소재와 친숙한 배우들을 섭외하여 간극을 좁히고 있다.


영화는 불가능한 어떤 사건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듯 멀리서 관망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을 관찰한다. 행여 강물 위에 물수제비를 뜨든, 거센 비가 내리치든 강은 계속 흐르는 것처럼 이들이 벌이는 사소한 사건과 무관하게 큰 줄기의 사건은 시간과 함께 흐른다. 설령 너무 냉정한 결말로 비칠지 몰라도 그것이 하나의 인생, 하나의 사회라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강이 흐르며 시간도 흐르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시기를 지나 영화는 봄에 닿는다. 그 끝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아마도 처음 마주한 감정과 처음 뱉었던 고백, 처음 좌절한 순간. 모든 것이 서툰 처음의 일일 것이다. 이들의 실패를 방관하는 차가운 시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들의 첫 실패를 누군가가 봐줌으로써 등장인물들이 어떤 성장을 하게 될지, 오늘의 실패를 어떤 자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갈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겨울은 봄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의 실패는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따뜻한 그들의 마음이 얼음 같은 실패를 녹이고 다시 강물을 흐르게 할 것이다.

https://youtu.be/N-TWTsKt6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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