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다라 Jan 05. 2021

정리 그리고 장비병

실패한 예술가의 고백 Vol.6






책상은 어느 인터뷰집에서 본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의 책상과 다를 바 없었다.

나에게 맞는 재료를 찾겠답시고 '유화'를 빼놓고 거의 모든 화구를 사서 써봤다.


마음 같아서는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마구 믹스매치하여 새롭고 흥미로운 드로잉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많은 선택지는 자유가 아니라 어찌할 바 모를 부담감만 줄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제대로 주지 못했고, 당연히 손에도 익지 않았다.


어느 재료도 나의 주무기라 할 만한 게 없었고,

자주 써서 가장 많이 닳는 색깔 같은 것도 없어 나만의 색감이라 할 만한 것도 마땅치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뭘로 그려도 그 사람 그림 같았는데,

나는 재료를 바꿀 때마다 다른 사람 그림 같았다.

다양한 스타일로 그릴 수 있는 것도 능력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력이 불안정한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린 게 곧 내 그림이라 생각하며 아무리 자신감을 끌어올려봐도

무엇을 그리든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따라한 것 같은 죄책감, 

나의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시달렸다.



/



화구를 팔거나 버리기 시작했다.

1차원적으로 재료라도 한정시켜 그림 스타일이 명확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현금 마련을 위한 목적도 있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았다. 워낙에 사놓은 게 많았다. 줄이고 줄이고 더 줄였다. 

그 재료가 없어도 그림 그리는데 문제는커녕 아쉬움이 1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진짜 쓰는 재료'와 '욕망 때문에 가지고 있는 재료'가 분명히 나눠졌다.  

정말 계속 쓸 것만 빼고 다 없앴다. 



/



이제 그림을 접기로 하면서 모든 화구들을 팔거나 버렸다.

쓰다 남은 스케치북, 필기구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재료들만 남았다. 

(물론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이 있어 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눈 앞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작은 미련도 다신 갖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로망과도 같았던 파스텔을 버리던 날, 조금 울었다. 허탈해서.

쓰던 붓까지 (구매자분이 판매내역을 보고 문의하시길래) 나눔 하듯 팔아버린 날도 조금 울었다.

진짜 끝이란 생각에.



/



이제 내 방은 그림을 그리겠다 다짐했던 날 이전, 그러니까 5년 전 화구가 하나도 없던 때로 돌아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책상. 불편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책상.

빈 공간에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다.


내가 과연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게 맞긴 할까.

작가처럼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알고 싶지 않은 진실. 









+


그동안 화구 쇼핑을 하며 생긴 노하우, 팁 좀 풀어보자면,


1. 연필은 톰보우, 스테들러, 파버카스텔, 블랙윙 등 다양하게 써봤다. 사실 연필 드로잉은 많이 하지는 않는 편이라 이런저런 평을 내리긴 조심스러우나, 개인적으로는 '스테들러 2B' 하나만 있어도 만능으로 사용하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


2. 색연필은 프리즈마(유성), 카렌다쉬(루미넌스), 파버카스텔(수채, 유성)을 써봤는데, 다 나쁘지 않았다. 어떤 스타일의 채색을 좋아하냐에 따라 다른데, 식물화 스타일의 연하고 자연스러운 색감 채색을 선호하면 파버카스텔을 추천할 것 같다. 프리즈마는 색감이나 발색이 좀 더 인공틱(?)한 느낌(나는 파버카스텔보다 프리즈마가 더 내 취향이었다). 카렌다쉬 루미넌스는 색이 예쁘고, 색연필 자체의 내구성이 좋긴 한데, 가격이 세고, 쓰다 보면 그렇게 큰 차이나 메리트가 느껴지진 않았다(카렌다쉬 팬이지만 솔직히). 


만약 지금 내가 색연필을 골라야 한다면 예전처럼 욕심내서 세트로 사지 않고, 화방에 가서 필요한 색만 브랜드 상관없이 낱개로 골라 살 것이다.(세트에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아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색이 너무 많다.)

굳이 브랜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프리즈마.


3. 오일 파스텔은 카렌다쉬, 시넬리에, 문교 갤러리, 루브르, 펜텔 그리고 크레욜라와 동아에서 나오는 어린이용 크레파스까지 써봤다. 


- 크레욜라는 작업용으로는 비추. 발색이 잘 안 된다. 아이들 그림 그리며 노는 용으로 딱.

- 동아 꿈빛 파티시에(?) 크레파스 : 플라스틱 똑딱이 가방과 만화체 캐릭터가 그려진 포장지만 참을 수 있다면 퀄리티는 놀라울 정도로 괜찮다. 가격도 정말 저렴하고. 카키색류, 살구색류 등은 어느 미술 브랜드에서도 찾을 수 없던 색조가 있었고, 발색도 정말 좋음.

- 시넬리에 : 가격 사악한 거야 유명하고, 거의 립스틱에 가까운 경도. 일러스트레이터 김참새님 작품처럼 꾸덕꾸덕한 채색을 좋아한다면 추천.

- 카렌다쉬 네오 파스텔 : 네오 파스텔 1은 유성이고 네오 파스텔 2는 수성 파스텔로 물을 묻히면 물감처럼 색이 퍼진다. 가격이 시넬리에보다는 저렴하지만 그래도 비싼 편인데 그만큼 발색도 좋고 색도 예쁘다.

- 문교 갤러리 : 가성비 짱. 내 기억으론 3~4만 원대에 72색을 샀던 것 같다. 요즘은 어떠려나.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잘 사용할 만큼 퀄리티가 괜찮다. 

- 펜텔 : 무난하다. 가격도 그리 부담 없는 편이고, 다른 브랜드들과 조금씩 색조가 차이 나서 보완하기 위해 산 정도. 개인적으로 문교나 카렌다쉬에 비해 색감이 쨍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루브르 : 화방넷에 팔길래 궁금해서 사봤는데, 솔직히 비추. 시넬리에보다 단단한 편인데 찌꺼기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많이 나오고, 발색도 애매했다. 몇 번 써보다 버렸다.


만약 지금 내가 오일 파스텔을 마련해야 한다면, 역시나 색연필처럼 낱개로 살 테지만, (오일 파스텔은 화방에서 발색 테스트가 아예 금지였던가?) 세트로는 예산이 많다면 카렌다쉬, 예산이 적다면 문교 갤러리 추천.



* 카렌다쉬 오일 파스텔, 루미넌스 색연필로 그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Damien F. Cuypers'의

인스타그램에서 발색이나 그림 느낌 참고해 보세요:)

http://www.instagram.com/damienfcuypers



4. 아크릴 물감은 윈저앤뉴튼과 신한 써봤는데,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 막 칠하는 스타일로 써서

구성된 색이 다른 것 외에 품질적으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음. 다시 사야 한다면 신한을 사서 쓸 것 같다.


5. 과슈는 카렌다쉬 고체 팔레트로 나온 과슈와 뻬베오와 홀베인 아크릴 과슈를 써봤는데, 홀베인 아크릴 과슈가 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물감 작업을 잘하지 않는 나지만 물감을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홀베인 아크릴 과슈를 고르고 싶을 정도로 색감도 예쁘고 발림성도 좋다. 알파나 조소냐도 좋다고 들었는데 써보기 전에 그림을 접게 되어서... 


만약 언젠가 물감을 사게 된다면 조소냐를 한번 사보고, 홀베인 아크릴 과슈에 정착하고 싶은.


참, 카렌다쉬 고체 팔레트 과슈는 물감을 그때그때 짤 필요가 없어 편하긴 했는데 구성된 색이 내가 주로 쓰는 색이 아니라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뻬베오는 나쁠 것도 없지만 특별할 것도 없었다 정도의 기억.


6. 수채물감은 사쿠라 코이 고체 물감, 미젤란 고체 물감, 신한 껄 써봤다. 신한은 아주 어릴 때에도 쓰던 거라 색감이 익숙하고 무난. 사쿠라 코이 고체 물감은 가격도 저렴하고 플라스틱 팔레트로 만만하게 갖고 다니며 쓰기 좋다. 대신 발색이나 내구성이 그리 좋지는 않은 편. 미젤란은 다른 브랜드에서 볼 수 없는 색상도 구성하고, 예전에 미젤란 대표님이 발표하는 세미나 같은데 참석해본 적이 있는데, 고체 물감을 만들 때 건조하는 과정에 공을 많이 들여 물감 내구성이 탁월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써보니 사쿠라 코이 보다는 물감이 갈라지는 정도가 적었다.


수채화를 주로 하지 않는 나로선 디테일한 차이는 모르겠지만, 만약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신한. 가격이나 퀄리티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오래 써서 색감이 익숙한 게 이유.


7. 마카는 신한 터치, 코픽 둘 다 써봤으나 큰 차이는 못 느꼈다. 가격은 코픽이 더 비쌈. 그냥 좋아하는 색깔 낱개로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 추천. 마카야말로 처음부터 세트로 사는 것 비추. 정말 예쁜 색은 세트 안에 없었다...


8. 스케치북


원진GR 스케치블럭 드로잉북 A5/A4 (백색 105g 80매) 추천. 

가격 대비 종이 질도 좋고, 장 수도 80장으로 넉넉해서 A4, A5 사이즈로 왕창 구매해서 쓰곤 했던 '만만템'. 

(화방넷 기준 A4 사이즈는 3,900원, A5 사이즈는 2,700원에 구매 가능)

A4 사이즈로 사면 스프링 아래 절취선도 있어서 깔끔하게 뜯어내기도 좋다.


105g짜리 종이는 일반 A4용지보다 조금 두껍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연필, 색연필, 파스텔 등 건식 재료는 찰떡이고, 각종 라이너 류의 잉크펜, 볼펜 등은 아무 문제없이 썼으나 

단, 딥펜은 선을 그었을 때 자세히 보면 종이 결 따라 자잘한 잉크 번짐이 있었다.


마카는 살짝씩 뒷장에 묻어 나올 때가 있고, 수채화나 아크릴 등 물감을 쓰면 종이가 운다.

참, 표지 색깔이 CMYK 4컬러가 있는데, 화방에서 직접 고르지 않는 이상

색깔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



파브리아노 아카데미아 스케치북은 120g짜리 50매 스케치북으로

위 원진GR스케치북보다 습식 재료를 쓰기에 좋아서 추천.

떡제본으로 되어 있어 한 장씩 깔끔하게 뜯어 쓸 수 있고,

화방넷 기준 A5 사이즈는 3,300원에 구입할 수 있는 가성비템!


9. 라이너는 스테들러, 파버카스텔, 코픽, 신한 터치 등을 써보았으나 브랜드별로 큰 품질 차이는 없었고 

사소한 느낌 차이 정도가 있었다. 그저 여러 가지 써보며 자기 취향에 맞는 굵기나 닙 모양(납작한 닙이 잘 맞는 경우도 있음)을 찾는 것을 추천. 브러시 펜 스타일 좋아한다면 파버카스텔 아티스트펜 시리즈 써보시길 추천.


만약 내가 지금 골라야 한다면, 스테들러 0.4, 1.2 납작 닙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지금 같아선 다 필요 없고 '보드 마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지만, 

늘 크게 크게 그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번외로 Paper Mate Ink Gel 0.5 라인 드로잉 하기에 참 좋았습니다.


10. 그밖에 구매팁.


- 인터넷으로는 '화방넷'이 대체로 저렴한 편. 스케치북, 지류 등 한 번에 많이 살 때 이용하면 좋고,

프리즈마 세일 자주 한다. 카렌다쉬도 가끔 세일하는 듯.


- 조소냐 물감은 사보기까진 했는데 (미개봉인 채로 중고판매), 화방넷보다 네이버 쇼핑에서 더 저렴하게 구매했었다.


-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삼원갤러리 군자역 쪽에 있을 때 한 번씩 포장 손상된 스케치북, 지류 등 할인해서 판매했음. 파브리아노 3~400g 고급 수채화용 스케치북 등은 그런 기회를 노려 마련해보는 것도 방법. 또는 화방에서 낱장으로 전지 사이즈 구입해서 잘라 쓰는 방법도 있음. 


수채화는 그램 수 높은 종이에 그려보면 신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에, 물 쓰면 울거나 때처럼 밀리는 종이에만 그려보신 분은 한 번쯤 수채화 전용 종이(200g 이상)에 그려보시길 추천드림.


- 물감, 오일 파스텔 등 이 조그마한 게 뭐가 이리 비싸 싶겠지만 써보면 꽤 오래 쓴다.


- 비싼 건 대체로 비싼 값을 한다. 그렇다고 싼 게 다 안 좋은 건 아니다. 나에게 '착붙'인 것, 잘 활용할 수 있는 걸 찾는 게 더 중요.


- 국산이 품질 떨어진다는 건 옛말. 특히 문교 '파스텔류', 오일파스텔뿐만 아니라 소프트 파스텔도 색감, 발색력에 치였다. 신한 픽사티브도 써보니 저렴하고 괜찮았다. 아, 문교 수성 오일파스텔은 얼룩이 좀 뭉치는 느낌으로 비추...




/




화구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아끼다 똥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떡해, 어떻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