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린 수영복과 테라의 부분유료화 전환
크래프톤웨이 책에서 '투지의 전장:블루홀2.0' 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유료화 전환을 통해 잠깐의 부흥기를 맞는 2013년의 이야기가 나오는 챕터가 있습니다.
책에서는 김강석 대표님이 북미유럽 시장의 성과가 좋지 않아, 부분유료화 카드를 준비해서 이사회를 설득하고 전격적으로 2013년 1월에 부분유료제를 도입해 테라의 부활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서술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지난번 글에서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던, 독자들을 위해서 작가님의 과감한 각색이 들어간 부분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기업활동이 그렇겠지만 경영진이 어떤 결정을 한다고 그렇게 뚝딱 진행이 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분유료화는 테라의 실적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2012년 초부터 이미 이야기가 올라오고 있었던 카드였습니다. 2012년 상반기에는 북미유럽지역 런칭이라는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의견이 이사회에서 검토되는 시기는 좀 이후가 된 것일뿐 내부적으로는 2012년 하반기부터 2013년 1월을 목표로 부분유료화를 준비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분유료화의 시기를 고민하시던 경영진에게 확신을 심어준 이벤트가, 일본에서의 엘린 수영복 판매 실적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합니다.
2012년 상반기에 매출을 증대시키기 위한 프리미엄 아이템(WOW에서 이미 하고 있던 상품. 성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돈받고 파는 외형 아이템)의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바일 게임이 일반적이 된 지금에야 확률형뽑기 아이템이 기본이지만, 그당시 2012년만해도 뽑기 상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모든 아이템은 WOW의 아이템들처럼 1만원~2만원의 정액 상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미국 런칭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전략적 포기를 결정했던 일본 지역은 담당자였던 제가 알아서 하면 되었었기 때문에, 개발팀에 뭐 해달라는 얘기만 안하면 꼭 한국의 정책을 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일본은 아이템 판매=가챠(뽑기 상자)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일본지역은 한국과는 달리 소모성 아이템을 넣은 가챠를 메인 판매방식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심지어 정액상품은 존재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운 좋게도 퍼블리셔였던 NHN Japan에서 웹으로 가챠가 구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임 빌드에서는 아무것도 안 건드려도 되는 상태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첫 판매 아이템은 수영복이 아니었고 백사자라는 탈것이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매출이 나와서 '역시 일본은 가챠의 나라'라고 감탄하며 다음 아이템인 수영복을 준비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게 엘린의 '스쿨미즈기'라는 아이템인데, 이 아이템 하루 매출이 그 전까지의 한국 수영복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렸다는 이야기로 유명하죠. 수영복을 아마 단품 판매했으면 그러기 힘들었을텐데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는 뽑기상자이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뭐 지금은 당연한 BM이지만 저게 2012년 그것도 PC게임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그때 당시로써는 경영진을 놀라게 할만한 큰 사건이긴 했습니다.
게임 웹진 기사에는 일본 퍼블리셔의 요청을 받아들여 쉽게 만들어 진 것처럼 나왔지만, 스쿨미즈 만들던 그 당시 개발실의 험악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요. 원래 개발 계획에 없던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무산될 뻔 했던 걸, 담당자들을 개인기로 살살 꼬셔가면서+그래픽팀에 아주 잠깐의 여유가 생겨서 기적처럼 만들어 냈던 아이템이라, 지나고 나니 정말 운이 좋아서 만들 수 있었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듭니다.
어쨌든 이렇게 일본에서 아이템 매출이 빵빵 터져주니, 경영진은 일본 라이브 운영을 담당하던 제게 한국라이브도 함께 맡으라는 임무를 맡겨주셨고, 아이템 판매를 중심으로 한 부분유료화로 전환을 하더라도 테라의 매출이 버텨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실제로는 부분유료화 이후 트래픽이 터져주며 더 오르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 당시는 떨어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 였기에) 김강석 대표님은 부분유료화를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구조조정으로 감원을 진행하게 되는데, 크래프톤웨이 책에서는 감원 이야기가 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2012년에 북미유럽 런칭의 실패 이후 진행되었던 큰 두가지 일 중 하나가 부분유료화의 준비였습니다.
9년전 제 페이스북에 위와 같은 글을 남겼었는데, 저 때 저런 글을 쓰게 된 배경이... 이걸 한마디로 축약해 표현하면 개발팀과 라이브팀의 갈등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건데, 부분유료화를 하기로 결정을 하고나서도 정말 회사 내부에 의견이 분분했었습니다. 부분유료화를 하자/말자 의 이슈는 아니었고, 어차피 부분유료화로 바뀌니 이 기회에 아이템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부분유료화를 하자는 개발팀의 의견에 장병규 의장님이 손을 들어줘서 생겼던 사건인데, 라이브팀장인 제 입장에서는 변변한 보상책도 없이 기존 고객들의 아이템을 쓰레기로 만드는 업데이트를 하겠다는 결정인지라 진짜 쓰나미가 따로 없었던 거죠.
논리적으로는 말이 됩니다. 부분유료화를 실행하면 새로운 유저들이 대거 유입이 될테니, 이때 들어온 유저들에게 현재 테라의 아이템 체계로 파밍을 시키면, 오픈베타 때와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리텐션이 나오게 된다. 이는 곧 부분유료화의 실패로 이어질테니, 부분 유료화 이전에 아이템 시스템을 완전 재정비하고 부분유료화를 진행하자.
아마 이 주장에 상식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당시 장병규 의장님도 이 말이 되는 계획에 동의를 하십니다. 아마 이거 반대한 사람은 저를 포함한 극소수 뿐이었을 겁니다. 당시 김강석 대표님과 함께 일본 출장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제가 사직서를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거 막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김강석 대표님께서 '과연 네가 장병규 의장님의 결정을 되돌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하시긴 했지만 반대하시지는 않더라구요.
좀 뜬금없지만, 저는 이 당시에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갈등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의 과감한 개혁안에 대해서 왜 그런 제안이 나왔는 지 심정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적인 '모 아니면 도' 식의 플랜이 가져올 여파를 분명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라이브 서비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당시 테라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진단에는 동의했지만, 개발팀이 제안했던 아이템 개편안은 너무나 허술했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수술을 할 것인가 vs 아픔을 안고 어쨌든 진통제 맞아가며 치료법을 찾을 것인가의 선택이었다고 해야하나... 여기서부터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확실한 수술 실패가 예상되는 상황이어서 사표를 던질 각오로 몇 개월에 걸쳐서 반대를 했었습니다. 당시 퍼블리셔였던 NHN의 팀장님도 와서 제발 개발팀의 업데이트 계획을 막아달라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적어도 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 당시 부분유료화 전환을 오픈베타 3주년에 맞춰서 진행한다는 계획 아래서 (이것보다 더 늦어지면 하락한 매출때문에 회사 자금 사정이 못버틴다는 계산이 나왔었기 때문에). 크래프톤웨이에도 나온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합니다. 1월 11일이 테라 오픈베타 서비스 일이었기 때문에 부분유료화까지 남은 시간은 6개월 정도였는데, 아마 저때 업데이트 이후에 부분유료화를 진행한다는 계획때문에 제 입장에서 거의 3개월을 날려버렸던 아픈 기억이 떠오르네요. 남은 3개월만에 한국,일본 빌드 통합하고 부분유료화 업데이트까지 했었으니... ㅎㅎㅎ 대체 그때는 어떤 에너지로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결국은 장병규 의장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남은 3개월이라도 벌어서 부분유료화를 준비할 수 있었던 건데, 설득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었습니다. 왜냐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부분유료화 이전에 아이템 체계를 정비해야만 그 이후에 들어온 이용자들의 리텐션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지극히 말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바로 설득에 성공한 건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계속 부분유료화 아이템을 잘 기획해서 일본의 매출을 계속 유지하면서 크레딧을 쌓았던 것이 쟤가 하는 소리가 헛소리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다시 사안을 검토해 보시게 만들었던 것 같긴 합니다.
결국 설득에 통했던 제 논리는, "개발팀에서 준비하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될 지는 모르나, 지금 우리 개발팀의 상황상 절대 내년에 계획한 부분유료화 일정에 못맞춘다.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그 계획을 없던 걸로 하고 부분유료화를 준비해도 시간이 모자랄 가능성이 높다." 였습니다. 결국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개발팀의 진척 상황을 지켜보던 장병규 의장님이 아이템 개편 업데이트 계획을 전면 취소하시고 라이브팀이 제안한 방식대로 부분유료화를 진행하는 것으로 다시 결정을 내려주셨고, 그 뒤에 지옥같은 3개월을 보내긴 했지만 어쨌든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했으니, 그런 책임감으로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결과는 책에도 나오다시피 2013년에 테라의 부분유료화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트래픽과 매출 양 측면에서 부활을 이뤄냅니다. 하지만 뭐... 계속 잘되지는 않았구요. 어쩌면 아이템 관련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 그 타이밍에 부분유료화를 하지 못했으면 그대로 블루홀은 높은 확률로 문을 닫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크래프톤웨이 책을 읽어보신 분은 느끼셨겠지만, 장병규 의장님의 인간적인(?) 면모와 꼭 좋지많은 않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모습들이 그 책에 여러번 등장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크래프톤의 성공 비결 중의 하나가 이런 의사결정 과정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장병규 의장님도 결코 한번 내린 결정을 쉽게 바꾸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새로운 정보가 인풋이 되면, 과거 자신의 결정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게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인 결정을 새롭게 하는 점이라고 할까요.
번아웃이 와서 회사를 매각하려고 결심했다가, 김강석 대표님이 3년만 더해보자는 이야기에 마음을 돌리신 점이라던가. 배틀그라운드도 처음에 그거 잘 안될 것 같은데...라는 태도로 김창한 대표님의 이야기를 잘 안 들어주다가, 뭔가 되는 조짐이 보이자 바로 전략을 수정해서 김창한 대표님에게 전권을 밀어주는 그런 면이 크래프톤의 지금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설득당하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제대로된 근거를 보여주면, 쿨하게 자신의 결정이 틀렸었다는 걸 인정하고 그 말을 들어주는 그런 태도. 이게 말은 쉬워도 이미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몸으로 보여주기에는 쉽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글이 '기승전-크래프톤 만세'로 마무리되는 느낌인데... 제가 지금 크래프톤에 재직중이 아니었더라도 같은 내용의 글을 썼을 거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글을 마무리 해 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