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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씨 Sep 12. 2018

서울 하나, 외계인 둘

나는 서울밖에 살고, 형은 서울 밖에서 왔다.

지구의 시간은 24시간

초등학교 때 배운 것들은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나마 기억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행성과 시간에 대한 내용이다. 행성은 각기 하루가 다르다. 행성이 자전 1번을 하는 걸 우리는 '하루'라고 부르는데, 이 한 바퀴 도는 시간이 다 다른 탓이다. 지구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24시간이고, 목성은 10시간, 해왕성은 16시간, 수성은 무려 1000시간이 걸린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은 높은 확률로 지구에 살고 있으실 테니, 여러분과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하루로 24시간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벌써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5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무척 신기했었나 보다. 아마도 '하루'라는 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던 거겠지. 아무튼 그렇게 초, 중, 고를 다니는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평등하게 24시간이 부여되어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에 산다. '수도권'이라는 말이 드러내듯 성인이 된 나의 생활은 수도, 그러니까 서울에 종속되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서울에서 회사도 다녔고, 이제는 작업도 다 서울에서 한다. 어느 지역이건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은 거점이 되는 대도시에 흡수되기 마련이라지만, 그 거점 대도시들도 서울에 흡수된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서울이 아닌 장소에 사람들은 죄다 어떤 식으로든 서울 종속될 수밖에 없다. 뭐, 하다못해, 애플 가로수길에 가서 지니어스바를 방문하더라도.

정장은 소장품, 신발은 손신발가게

나는 외계인이다

우리 집에서 서울 어딘가에 가는 데에는 적게는 1시간, 길게는 3시간이 걸린다. 돌아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적게는 2시간, 길게는 6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다. 이 시간 동안은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된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니, 일을 해도 되고, 책을 봐도 되겠지만, 대중교통을 타는 동안 뭔가를 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단순히 버스나 지하철에 타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소비되는 탓이다. 일종의 여독(旅毒, 여행으로 말미암아 생긴 몸의 피로)이다. 결국 그 시간은, 통학이나 통근을 한 사람은 알겠지만, '그냥 써야만 하는 시간'이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나의 하루가 몇 시간인지 짚어보자. 24시간일까? 아니면 22시간에서 18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일까. 온전히 사용하는 시간만을 생각한다면 나의 시간은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18시간이라는 시간은, 지구의 하루보다는 해왕성이나 천왕성의 하루에 가깝다. 초등학교의 선생님께 다시 여쭙고 싶다. 선생님, 그럼 저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닌데, 그럼 지구인이 아닌 건가요 선생님?

베레모와 상하의 모두 Otherworldly 콜렉션라인, 부츠는 손신발가게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우리 포토그래퍼 형은 울산에서 자라,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로 왔다. 광개토대왕마냥 북진했다. 실제로 형은 (실제로 그랬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광개토대왕의 이미지만큼 열정적인 사람이다. 매일 '아, 오늘도 현실과 타협했어.'라며 탄식하지만, 서울에 남아있다는 게 그 증거다.


유명 포토그래퍼 실장님들의 스튜디오는 죄다 서울에 있는터라, 재능이 있는 젊은 포토그래퍼 역시, 서울에 편중되어있다. (서울 밖에 없다는 게 아니다. 비서울지역에도 참 잘하시는 분들도 많다. 다만 서울이 압도적으로 수가 많을 뿐이다) 하지만, 수요는 서울 밖에도 있는지라, 형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지금 하는 일들을 한다면, 수익적으로는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어쨌건 그 빡빡한, '서울에 있는 재능 있는 젊은 포토'라는 풀에서 생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고 했다. 결국 형은 서울에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울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기회는 서울에 훨씬 많으니까.

베레모와 상하의 모두 Otherworldly 콜렉션라인, 부츠는 손신발가게

지구인이 되고 싶은 외계인

우리 포토그래퍼 형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 시장 명의의 주민등록증도 가졌고, 서울시에서 사업자등록도 하고 일도 한다. 이렇게 분명 '서울 사람'이건만, 사실 여전히 형은 '진짜 서울 사람'은 못 된다.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를 '어디 사람'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모양이다. 정말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가장 쉬운 것만 고르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있다. 첫 번째, 해당 지역에 살아야 한다. 두 번째, 그 지역 사람들과 같은 문화를 향유해야 한다. 세 번째, 거기서 나고 자랐어야 한다. 네 번째, 너무 잘나서, 어떻게든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 조건을 모두 만족할 필요는 없지만, 몇 가지는 맞춰야만 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두 번째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은 서울 사람이 되지 못한다. 서울 밖에서 나고 자란 형은 서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문화를 누렸다. 어릴 때 롯데월드로 현장학습을 가지도 않았고, 말을 해도 '졸려'보다는 '잠 온다'가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서울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만, 형은 어떻게 해도 서울 사람이 될 수 없다. 서울 사람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잘나서,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만 진짜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 결국 그때까지 형은 '서울 사람이 되고 싶은 주변인'이 된다. alienated 된다. 서울이 지구라면, 형은 지구인이 되고 싶은 외계인이다.


외계인 둘이 있다. 서울에 속하지 못하는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있다. 


제작 / 

에디팅 : 신동윤 (azmoadys@gmail.com) 

사진 : 김윤우 (INSTA @yoonookim)

모델 : 김현중 (Esteem models)

스타일링 : 김현정 (INSTA @wokw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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