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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씨 Aug 15. 2018

사라진 동창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은 학우였다

초등학교 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학교를 같이 다녔었다. 한반에 한명씩은 꼭 있었고, 개중에는 2명씩 있는 반도 있었으니 10명이 조금 안되는 숫자였던 듯한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

수인와 한보(가명 처리)라는 아이들이었는데, 학내에서 가장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두 명 다 외관상으로는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를게 없었지만, 둘은 크게 달랐다. 수인이는 항상 화가 나있었고, 우리들에게 소리를 질러댔고, 욕을 해댔다. 반면 한보는 말도 거의 하지 않고, 항상 조용히 우리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달장애아와 자폐아의 차이였지만, 그때는 그런건 전혀 없었다. 수인이는 괴롭힘의 대상이었고, 한보는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모두 '수인이는 나쁘고, 한보는 착해요'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선생님도 한보와 수인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가지고 있는 장애의 차이라고 하기엔 우리는 너무 다르게 행동했다.  

잊고 있던 이 기억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보다가 떠올랐다. 시키는 대로 하는 강아지를 착한 강아지, 통제가 안되는 강아지는 나쁜 강아지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한보를 착한 애, 우리와 반목하는 수인를 미친X이라고 불렀다. 그래, 맞다. 우리는 이 친구들을 우리와 같게 보지 않았다. 그네들의 사정따위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한보와 수인는 부모님도 달랐다. 한보의 어머니는 항상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우리 실수로 한보가 다쳐도, 혹은 그저 한보와 같이 다니는 것 만으로도, '미안해, 잘 부탁해요.'였다. 수인이의 어머니는 그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할 뿐이었다. '이해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잘 부탁해요.'였고.


결국 우리 곁에 남은 건 '착한 한보'가 아닌 '나쁜 수인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보는 특수학교를 갔고, 수인이는 우리와 함께 중학교를 갔다. 중간에 이사를 가는 탓에 전학을 가게 되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결코 온전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는) 동등한 학우로서 인사를 받고 떠나갔다.


우리 사회는 늘 장애인을 배제해 왔다. 사회는 너무나 당연하듯이 그래왔고, 심지어는 구글에 장애아 출생율을 검색해도 한국자료는 찾기조차 어렵다. 결국 학우로 떠난 수인이를 생각해보면, 배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을 교육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다못해 개도 '나쁜 개는 없다!'라며 동등하게 대하는 세상인걸.


지금은 바뀌었을까. 가끔씩 진행하는 중, 고등학교 수업에서 여전히 장애인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보면, 크게 바뀐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구현모 (Hyun Mo Koo) 형 글을 보고 문득 이 두 친구의 이름이 기억이 났다. 페북에서도, 인스타에서도, 동창회에서도 볼 수 없는 이 친구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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