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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Mar 12. 2022

모멸감이라는 마음

"근데 야, 항의를 어떻게 하냐. 일하러 갔는데 일을 시킨다고 항의를 해도 되냐. 부당한 일을 시키면 항의하라 그러는데, 근데 그게 뭐냐고. 부당한 게 뭐냐고. 너는 아냐? 뭐는 항의해도 되고 뭐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지? 그게 딱 구분이 되냐?" - 최진영, <일요일>


안녕하세요, 프랑스 파리 소재 한인 제과점 열매(Yeolmae)의 김익명 사장님, 그리고 같은 곳에 근무하시는 김익명의 아내 박가명님. 저는 2021년 10월 2일부터 12월 13일까지 귀사에서 제과사(pâtissière)로 근무한 노동자 햇님의 대리인 마음입니다. 


내용증명을 받으셨지만 먼저 이하의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드립니다. 햇님은 귀사의 제과사 모집 공고를 보고 작년 10월 1일 사업장에 찾아가 면접을 본 바 있습니다. 당시 김익명 사장은 ‘수습기간’이라는 명목으로 프랑스 요식업계의 관행이 되어버린 무보수 3일 근무를 제시했습니다. 다행히 첫 근무날 햇님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은 “바로 계약서를 쓰자”며 무보수 3일 근무 제안을 철회했고요. 


노동계약서를 작성한 이후 사직 의사를 밝힐 때까지 햇님은 귀사에서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였습니다. 귀사의 대표메뉴인 진흙돌멩이빵을 구하러 온 고객들의 긴 줄을 보거나 파리에서 가장 큰 한인마트에 자신이 만든 케이크가 납품되어 있는 모습을 봤을 때, 햇님은 귀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자긍심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충만감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면접 당시 그토록 친절하던 김익명 사장님께서 서서히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죠. ‘내가 없어도 되겠다’고 판단한 사장은 점점 자신의 일을 햇님에게 넘기기 시작했고, 햇님은 정해진 근무시간을 훌쩍 넘겨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사장은 휴대폰으로 한국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었고, 햇님은 대형 오븐에 구워진 케이크를 꺼내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피로와 회의감이 극에 달한 햇님은 지난 12월 13일 사직을 알렸습니다. 그동안의 초과근무시간은 이미 12월에 일한 총 근무시간을 넘긴 상태였습니다. 사직을 알리고, 기다렸습니다. 고용주가 퇴직한 노동자에게 의무적으로 발급해야 하는 퇴직서류와 잔여임금을.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사직 후 업무량이 증가했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던 햇님은 다시 기다렸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새해 연휴로 퇴직 처리가 지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또다시 기다렸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지인들의 조언을 구한 끝에 본 대리인의 이름으로 등기우편을 보냈습니다. 2월 28일까지 서류와 임금을 촉구하는 내용증명이었죠. 그제야 제게 연락한 사람은 “담당자”라고 주장하는 사장의 아내 박가명님이었습니다. 오전 10시경 이렇게 문자를 보내셨죠. “담당자가 오늘 오후부터 휴가입니다. 서류와 미지급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1시까지 가게로 오시기를 요청드립니다. (...)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하니 우편발송이 불가합니다. (...) 또한 초과수당에 대한 객관적인 증빙자료를 부탁합니다. (...) 원만한 해결을 원하신다면 저희 요구에 응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후 1시가 넘기자 다시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저희가 제안드린 시간에 부응하지 않으셨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에도 응하지 않으셨기에, 담당자가 휴가가 끝나는 3월 10일까지 기다리셔야 한다는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당신들의 문자를 확인한 그날,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확인했다. 돈을 내는 자의 무례와 경멸을, 수치심까지 짓뭉개는 뻔뻔함을,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서도 불공평이나 역차별이란 단어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했고 더 알아야 할 것들이 두려웠다." - 최진영, <일요일>


귀사에게 이상의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본 대리인이 5일이 지난 오늘에야 연락을 취하는 이유는, 귀사의 태도에 노동청과 노동법원 신고를 결심하고 변호사의 법률상담을 받은 후 응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말씀드립니다. 노동법 전문 변호사의 상담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귀사가 퇴직 처리를 위해 해당 노동자에게 오전 10시에 연락을 하여 당일 오후 1시까지 사업장으로 오라고 통보하는 것은 명백히 부당한 요구임. 당장 3시간 안에 사업장으로 와서 서류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할 뿐 아니라 사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노동자를 압박하려는 부당한 행위임. 소송시 사측의 부당행위로 주장 가능한 근거이기도 함.


2. 자신이 담당자라 주장하며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3월 10일까지 처리가 불가하다’고 통보한 박가명의 행위 또한 부당하며 고의적 태만임. 

    2-1. 해당 노동자가 이미 2021년 12월 13일 사직 의사를 명백히 밝혔으므로, 귀사는 해당 노동자의 퇴직서류와 미지급 수당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에는 노동자에게 연락을 취할 의무도 당연히 포함됨. 귀사는 해당 노동자의 휴대전화번호는 물론 자택 주소, 이메일 등 기타 연락처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직 절차와 관련한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은 바 있음. 귀사는 현재 상황에서 이미 노동법을 위반한 상태임. 

    2-2. 각 사업장에는 전담 회계사가 있으므로 박가명이 부재중인 상황에서도 퇴직 절차 수리에는 무리가 없음. 노동자의 체불임금을 주지 않으려는 전형적인 사측의 부당행위이며 역시 소송시에 사측의 의무 방기로 받아들여질 근거임. 


3. 서류 서명 관련, 해당 노동자의 상황(외국어로 쓰여진 서류들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과 현재 프랑스 상황(코로나 시국으로 비대면 서명을 선호하는 추세)을 고려할 필요가 있음. 이미 부동산 계약이나 비자 발급 등 중요한 서류 처리가 모두 비대면으로 바뀌고 있으며 실제 파리의 여러 사업장에서도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함에 따라 각종 노동서류의 서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임. 따라서 “퇴직 서류의 우편 발송이 불가”하다고 말한 박가명의 행위 또한 사측의 고의적 태만에 해당함. 


4. 이상으로 판단했을 때 “초과수당에 대한 객관적인 증빙자료 첨부”를 요청한 귀사의 행동은, 해당 노동자의 퇴직을 원만히 처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이해됨. 해당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증빙자료를 보낸다 해도 ‘객관적이지 않다’고 답하며 추가수당지급을 거부할 의도임. 특히 해당 노동자의 초과근무를 명백히 알고 있을 김익명 사장이 숨어버린 채 담당자라고 주장하는 박가명을 앞세워 ‘증거 요구’를 하는 것은 해당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저버린 행동임. 


상기의 내용을 짚으며 변호사는 바로 노동청과 노동법원에 동시 신고를 강력히 권유했으며, 이에 동의한 당사자 햇님과 본 대리인은 변호사 선임 직전에 마지막으로 연락드립니다. 내용증명에 기재된 퇴직서류와 체불임금을 2022년 2월 28일이 아닌, 2월 20일까지 지급하지 않는다면 바로 법적절차와 언론제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급할 생각이 없다면 빠른 변호사 선임을 위해 2월 20일 전에라도 일찍 연락주시면 좋겠지요. 


돈과 시간과 에너지 낭비보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 모멸감이라는 마음입니다.



실제 보낸 편지를 기반으로 공익을 위해 보완했습니다.

상호, 이름, 상품명은 가명이며 날짜도 다릅니다.

해당 사업장의 태도는 즉각 바뀌었고, 모든 퇴직서류와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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