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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Mar 15. 2022

책읽기의 최전선: 서양미술사

"안녕하세요. 여기는 봉쇄 조치가 내려진 불란서, 저는 월요일 오후에 침대에 들어가 금요일 저녁에 기어나온 자입니다. 저 자신 너무 한심해서 랜선 책모임 하나 열까 합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같이 읽으실 분 계시면 제게 연락주세요. 6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28장으로 짜여져 있으니 천천히 읽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으네요. 가히 기록에 남을 수면 이후 저는 한국 시간에 맞춰 생활하고 있으니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2020년 3월 중순,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렸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유럽을 덮친 때였다. 생필품 구매나 병원 방문 등의 필수적인 외출 이외엔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공기를 맡으며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다. 집에서 책이나 읽자고 생각하며 책장을 살폈다. 한국에서 모셔온 후 한 번도 들추지 않은 <서양미술사>가 눈에 들어왔다. 1kg에 달하는 688쪽의 벽돌책을 혼자 읽자니 기가 질려, 처음으로 인스타그램에 '모임'을 열자는 제안을 띄웠다. 파리와 서울에서 일곱 명의 외로운 이들이 응답했다. 단톡방이 만들어졌고 줌(zoom) 링크가 올라왔다. 수줍은 자기소개도 시작되었다.


가끔씩 우리들은 모이기로 한 날에 급한 사정이 생기거나, 갑자기 아프거나, 심지어는 집에 도둑이 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모임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내 입장은 간단(하면서 유일)했다. 시험 치러 모인 것 아니니 많이들 참석할 수 있는 다른 날로 바꾸면 됨. 그렇게 다섯 달 동안 <서양미술사>를 천천히 읽고 나니 뜨거운 여름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 책이, '필독서'라는 명성에 걸맞게, 예술에 대해 친절히 얘기해 주는 좋은 책이라는 데 동의했다. 모두들, "어느 정도" 라는 조건을 붙여서. 그러니 여기서 말하려는 건 저자의 유려한 설명에 감탄한 시간들이 아니다. 그보다 더 기억에 남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곰브리치의 시선에 반대한 순간이다.


"이 책의 원제가 'The Story of Art(미술사)'라는 건 문제가 있어요"라고 A가 말한 날을 기억한다. 책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슬람교와 불교 미술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전체 맥락과 분량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을 다양하고 자세하게 기록한다. 지역별로도 그렇고("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쾰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작가별로도 그렇다("16세기 초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레조와 조르조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등 기타 수많은 거장들의 시대였다").


그에 비해 동양미술에 대한 기록은? 턱없이 축소된다. '동방의 미술'이란 이름의 7장에서 우리가 단 한 명의 작가 이름-4세기 중국 화가 고개지顧愷之-만 발견할 수 있듯이. 축소는 삭제의 다른 말인 것을 상기하니 기록자가 "동방의 미술"을 대부분 삭제했다는 사실이 딸려 나온다. 곰브리치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문장("이 책에는 위대한 한국의 미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은 그야말로 겸손한 헛소리의 표본인 것이다. 그가 진정 한국 미술을 위대하다고 판단했다면 어떻게든 책에 수록했을 것이기에. 그래서 A는 저항했다. 지독하게 서양 중심적인 기록을 '미술사'라 부른 곰브리치의 시선에.


"여기 나오는 케테 콜비츠, 이 작가 외에는 곰브리치가 직접 언급한 여성 미술가가 없어요"라고 B가 말한 날도 기억한다. 이토록 두꺼운 미술사 책에 여성 미술가가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은 그대로 '백인 남성'인 기록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그는 말했다. 곰브리치가 선정해 <서양미술사>에 수록한 총 413개의 도판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들은 여신이나 성모이며, 여인이나 아내며, 유모나 하녀, 때로는 무희나 전사다. 여성은 그려지기만 했을 뿐 그리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B는 우리를 가려진 진실 속으로 인도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출현을 기록하며 곰브리치는 그들이 환영받지 못했던 19세기 파리를 설명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조롱한 당시 기사까지 친절하게 인용하면서. "화랑에 들어갔을 때 내 눈은 끔찍스런 무엇에 사로잡혀 버렸다. 여자도 끼어 있는 대여섯 명의 정신 질환자가 합세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하는데, 사람들은 이 그림들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B는 우리에게 이 기사에 나오는 '여자'가 베르트 모리조라고 알려줬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미술가라고. 당시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작품을 선보인 이들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등이었다고. 지금 곰브리치는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며 인상주의의 위대함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만, 그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에 베르트 모리조는 여전히 빠져 있다고. 그렇게 B는 저항했다. 분명히 존재한 여성 미술가들을 지워버린, 편협한 곰브리치의 시선에.


일곱 명과 <서양미술사>를 같이 읽은 다섯 달. A와 B 말고도 다른 구성원들의 수많은 '저항의 말들'이 들렸다. 그들 덕분에 나는 "책들을 다른 방식으로 (...) 두려움이나 숭배를 마음속에서 배제"(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조금 엉뚱한 '저항의 말'은 짝꿍과 나의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날 <서양미술사> 서문을 같이 읽다가 다음 문장에 빈정이 상했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분명히 음식과 술에 대한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맛을 발견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훨씬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다." 수직적인 서열을 내세우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관등성명, 상하관계, 위계질서, 계급사회' 같은 역한 냄새가 올라왔고, 불쾌감 후에는 안타까움이 찾아왔다. 짝꿍과 나는 결론 내렸다. 아아 불쌍한 곰브리치... 당신은 정말 맛있는 술과 음식을 느껴보지 못했군요.


<서양미술사> 책읽기가 끝나고 한 달 뒤, 짝꿍과 나는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날 바티칸을 버리고 우리가 향한 곳은 이태리의 대형식품매장 잇태리(Eataly)였다. 짝꿍의 판테온, 짝꿍의 시스티나 성당. 어떤 파스타면을 쓰고 무슨 향신료를 사용하는지에 따른 복잡한 취향은, 짝꿍에게는, 카라치와 카라바조의 '이상주의-자연주의' 논쟁이나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형태-색채' 논쟁이 가지는 가치와 동등하게 중요하다. 식재료 앞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훌륭한 음식 앞에서 더없이 행복을 느끼는 짝꿍을 보며,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결국 "음식과 술에 대한" 그림인지도 몰라. 궁금해졌다. 예수와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에서 무슨 빵과 어떤 술을 먹었으며 그 맛은 어땠는지. 곰브리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수직적인 시선에 반대해요. 감미롭고 아름다우며, 순간적이기에 더욱 찬란한 예술의 세계가 있어요. 그토록 "진지하고 중요한" 세계는 '맛'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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