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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Nov 11. 2021

정지우의 「너는 나의 시절이다」를 읽고

요 몇 주간, 남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웠다. 섣불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걸 보면 사안이 작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함께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재촉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만, 그가 말할 준비가 되었을 그때를 기다리고 싶었다. 



깜깜한 방, 침대 위에 모로 누워 핸드폰을 감싸 쥐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그를 앞으로 돌려 눕히고 가슴 위에 쓰러져 온 몸을 감싼 채로 잠깐만 이러고 있자고 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나의 체온이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일 수 있기를 기도했다. 내가 체중을 다 실어서 엎어진 상태를 그도 별로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남편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도 그 상태로 한 한 시간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들어 있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쓰다듬어 보았다. 남편 뺨 위의 짧은 솜털이 손바닥에 닿아서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의식이 돌아왔는지 남편이 눈까지 뜨고 어리둥절하게 나를 쳐다보는 일이 벌어졌지만, 싱겁게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짓다가 돌아누워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고로롱 고로롱하고 나직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사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사귀기 시작해서 양가 집안을 엮어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 가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낸 무수한 일상들은 연애시절 꿈꾸던 낭만과 거리가 먼 것이 더 많았다. 갑자기 집을 옮겨야 한다거나, 빚을 져야 한다거나, 아이가 아프다거나, 직장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를 겪을 적에는 그야말로 서로를 붙들어 의지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남편이 미덥고 애틋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쩌자고 이런 사람과 평생을 살겠다고 나서서 고생을 사게 되었나 혼자서 한탄하던 순간도 있었고, 결혼 전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모습을 이제사 드러낸 저 자식은 진짜 나쁜 놈이라고 분노하던 순간도 있었다. 



마늘을 잔뜩 먹고 와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거나,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면서 혼자 흐뭇해한다거나, 심지어 내가 노트북을 켜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을 때 곁에 와서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남편을 보면, 아직도 한숨이 나오고는 한다. 그런데 이제는 이십일 년을 함께 살아버려서 그런지, 예전처럼 심각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입에서 풍기는 마늘냄새보다는 막걸리에 쌈장 찍은 생마늘을 씹으며 속을 달래야만 했던 그의 하루가 더 아리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남편 앞에서 입냄새를 풍긴다거나 예민한 소리를 하고 나서 그리 거리낌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도 그는 이해할 거라고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부터 정지우 작가의 책 <너는 나의 시절이다>를 읽고 있다. 그가 쓴 사랑 이야기가 나에게로 옮겨와, 나의 사랑이야기도 내놓아 보라고 종용하고 있다. 요 며칠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나 자세하게 적게 된 것도 다 이 책을 읽어서 생긴 마음의 작용이 아닌가 싶다.



“이 나이 되도록 이때까지 뭘했지?”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대성통곡을 해버렸다는 동료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중년의 나이에 모아둔 재산은커녕 번듯한 직장도 집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을 자각하고 나니 그렇게 속이 상하더라는 것이다. 뭐라고 답을 해주고는 싶었는데, 나도 상황이 다르지 않은데다, 떠오르는 말도 없어서 멍하니 듣기만 했다. 코로나다, 부동산 폭등이다, 너도나도 힘든 시절이었다. 



‘잘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대체로, 어지간해서는, 괜찮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p.196).’ 밑줄 쳐놓은 문장을 다시 찾아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눈물을 흘렸다던 나의 동료에게, 그날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던 나에게, 그리고 무언가를 감내하느라 부던히도 앓고 있는 남편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다시 간절히 읽어보았다. 주문을 외듯 막연하고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나는 이 문장이 그렇게 좋았다. 긴 세월 내 삶을 배반한 적 없이 지켜주었으나, 한 번도 말해지지 않았던, 어떤 굳건한 믿음을, 책이 문장으로 제련하여 선물한 것만 같았다. 



정지우 작가를 알게 된 것은 2018년이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숨진 청년노동자 김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사회와 노동재해,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실감을 이야기하는 그의 글을, 책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뼈가 있는 책>과 <고전에 기대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서도 그를 만날 수가 있었다. 인문학적 주제나 고전을 다룬 그 방송이 생각보다 재밌어서 방을 닦거나 설거지를 할 때마다 이어폰을 꽂고 듣고는 했다. 특히 내가 엄마를 잃고 몇 년이 지나도록 마음을 잡지 못하고 혼자서 쩔쩔 매고 있을 때,  마음껏 울어도 좋다고, 마음껏 엄마를 기억해도 좋다고 하는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어주던 그의 방송은,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후 '돕는다는 것은 타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 삶 자체이며 우리 삶의 정수'라고 한 책 <사람은 왜 서로 도울까>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한 언급이 빛났던 철학에세이 <분노사회>, 고전에 대한 독서록 <고전에 기대는 시간>, 그리고 청년・젠더・공동체의 문제를 다룬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연달아 읽으면서 나는 그에게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독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책은 5권이지만, 아직 30대 중반인 정지우 작가가 이제껏 출간한 책은 12권이 더 넘는다. 하지만 그는 올해부터 변호사가 되어서, 더 이상 전업작가는 아니게 되었다. 평생 작가로만 살지 않고, 어째서 법 공부를 하게 되었을까,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다 ‘변호사가 되겠다고 멋지게 마음을 먹었다기보다는 현실에 발 딛게 할 생활에 책임을 질 수 있을 수입과 직장이 필요했다’는 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은 날이란 거의 없다고 하던 책 속 그의 문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페이스북에 매일 뜨는, 마음을 다해서 쓴 그의 글을 매일 읽는 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생각이 많아졌다.



이번에 출간된 <너는 나의 시절이다>에 실린 글들은 정지우 작가가 대부분 로스쿨 재학 시절에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큰 방황의 시기를 겪었다’고 한 시절,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는 바로 그 시절에 쓴 글이다. 가장 아플 때 ‘사랑’에 대해 기록을 한 것이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데, 빛에 따라 갖은 색을 반사하는 블링블링한 표지 위에 ‘사랑 愛세이’라는 글자를 보고 나서는 개인적으로 책장을 펼치기까지 애를 좀 먹었다. ‘지치고 힘들 때 하나씩 꺼내먹어요’하는 멘트를 단 「마음에도 엉덩이가 필요해」류의 힐링에세이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지우 작가는 3개월간 내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글쓰기 선생님이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책을 보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선입견에 따라 쉽게 낙인을 찍고 판단을 내리는 어떤 습관이 마구 발동되는 나를 발견하고 혼자서 많이 놀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순간순간, 가장 아름다운 삶을 고민하던 글을 단순하게 ‘힐링’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제법 오랫동안 글을 쓰고, 문학을 탐독하고, 많은 걸 바쳤다. 하지만 삶은 내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소설은 공모전에서 줄줄이 떨어졌다. 어쩌면 더 집요하게 그 길을 걸어 가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내 길이 아니라 믿고 소설 쓰는 일을 관두었다. 그 뒤로 다시 십여 년이 흘렀다. 지금 나는 소설가도 아니고, 전업 작가라 할 만한 입장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랬듯 어제도 썼고, 오늘도 쓰고 있다. 어떤 글이 되었든, 내가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은 날이란 거의 없다. 나는 글만 쓰는 직업으로 인생을 살아내고 있지는 않지만, 어쩐 일인지 그와는 상관없이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그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많은 책을 쓰고 힘든 시험을 통과하고 멋진 직업을 가진 정지우 작가도 멋지지만, 나는 그가 수없이 많은 절망과 좌절 앞에서도 끝내 다정함과 성실함을 놓지 않는 사람이라서 많이많이 좋아한다. 고통에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떠올리고, 그 순간의 의미를 기억하고, 잘 사랑하는 일을 고민하고, 더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다듬던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살면서 쓰는 사람, 쓰면서 사는 사람, 매일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의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 2021.5.2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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