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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스민 Jul 06. 2020

멘탈로 버티며 산다는 것.

정신건강에도 전문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남동생이 대상포진에 걸렸단다. 한쪽 팔목부터 어께 쪽으로 수포가 올라왔는데 회사에 이야기하지 않고 그렇게 긴팔 셔츠로 팔을 가리고 다닌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련하게 회사에 휴가를 쓰겠다는 말 조차, 아니 오전 중에 병원 진료를 받고 출근하겠다는 말 조차 하지 못하고 주말까지 반납해가며 일하고 있다는 올케의 걱정스런 하소연이 있었다.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겠지. 잠은 제대로 자려나. 몸도 몸이지만 동생의 정신건강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약 3년 전 만성피로 진단을 받고 회사에 한 달 간의 휴직을 받은 적이 있다. 원래는 그 시기에 불면증이 몇 달간 지속되어 고민이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들은 친구가 만성피로로 인한 수면장애일지도 모른다며 한 의사 선생님의 만성피로에 관련된 블로그 글을 추천해 주었고, 블로그를 더 찾아보다 그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해본 결과 만성피로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이야기만 들으면 의아할 수도 있다. 만성피로. 피로하면 뻗어서 자야지 웬 불면증이란 말인가.



스트레스를 견디는 건 멘탈이 아니라 호르몬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듣고, 찾아보고 본인이 이해한 내용을 적는 것임을 사전에 밝힌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티솔(cortisol)이라는 물질을 발생시킨다. 이 코티솔은 우리 몸이 스트레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발생시키는 호르몬이란다. 근육을 긴장시키고 감각 기관을 예민하게 하며 정신을 또렷하게 하는 것이다.


정상이라면 오전에 이 호르몬이 가장 많이 발생해 저녁때가 되면 수치가 가장 낮아지고 잠에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코티솔을 분비하는데 장애가 생기면 저녁때가 되어도 이 수치가 떨어지지 않고 더욱 긴장상태가 되어 잠에 들지 못하며, 잠에서 깨어나야 할 오전에 코티솔 수치가 가장 낮아 굉장히 피로한 상태로 깨어난다. 그렇게 피로한 상태로 스트레스를 맞이하고, 저녁에는 긴장상태를 풀지 못하고, 그럼 또 불면증에 시달리다 다시 피로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호르몬은 뿜뿜 분출되다가 어느 순간 고갈상태에까 이르게 된다. (내가 받은 진단명을 정확히 말하자면 '만성피로'가 아니라 코티솔을 분비시키는 '부신'이라는 기관의 기능 저하였다. 이는 만성피로의 원인이 된다.)


내 경우에는 그 시기에 건강검진도 받았었는데, 부교감신경이 매우 떨어진다는 결과를 받았다. 교감신경의 경우 외부로부터 큰 자극을 받을 경우 활성화되어 신체를 긴장모드로 만들고, 부교감신경은 반대로 안정적인 상황에서 활성화하면서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그 긴장을 이완시키는 기능이 낮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래서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도 머릿속에는 생각이 맴맴 맴돌고 계속 정신이 또렷또렷한 긴장상태를 유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종합적인 설명을 의사 선생님께 다시 들으며, "아, 제가 멘탈이 약한가 봐요." 하며 멋쩍은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였는데 의사 선생님께서는 "무슨 소리세요. 멘탈이 너무 강하니 버티다 (몸이) 이렇게 되신 거죠."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렇구나. 신체기능은 이렇게 떨어져 가는데 정신력만 믿고 내가 너무 꼿꼿이 버텨왔구나. 이런 생각이 이어지는데, 한편으로는 후회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고 눈이 뜨거워지더라.



네가 예민한 건 네 성격 탓이 아니야


진단을 받은 후에는 몇 가지 약을 처방받았다. 신경안정제와 항우울제, 그리고 떨어진 기능을 올리는 보조영양제. 여기서 걸리는 것은 항우울제였다. 원래 수면장애가 있을 때 같이 먹나? 신경안정제와 같이 먹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약을 처방받고는 끝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했다. 방문해서 의사 선생님은 지속해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수면상태는 어떤지, 활동할 때는 어떤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등. 그리고 그 답에 따라 처방받은 약을 조절해 주셨다.


그렇게 병원에 다니며 약에 도움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잠에 들 수가 있었고, 점점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고 나니 몸의 피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분까지도 점점 회복되는 것이었다. 날카로웠던 마음들이 가라앉고, 행복감이 차오르며, 자아가 회복되는 느낌.


점점 예민해질 때는 몰랐던 내 상태를 회복이 되고 나서야 느꼈다. 아, 내가 그간 너무 날이 서있었구나. 그간 내 기분이 바닥을 헤엄치고 있었구나. 나는 원래 이런 행복함을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나는 원래 친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간 내가 잃고 살고 있었구나. 모든 건 스트레스 때문이었구나. 스트레스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정신 건강에도 의학의 힘이 필요해


미생의 명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그렇다. 스트레스는 건강을 망치고 있었고, 건강은 다시 정신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기르면 될 일 아닌가?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적절한 치유가 필요하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스트레스가 감기와 같다는 것을 느꼈다. 감기는 몸이 스스로 회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볍게만 여기고 방치하다가 몇 주, 몇 달간을 골골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폐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스트레스의 경우 충분한 휴식, 약간의 운동, 취미활동 등으로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고 내 경우와 같은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우울증에 이르고, 예민함을 넘어서 공격적인 성향을 띄게 될 것이며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미 심해졌다고 여겨진다면 치료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건강이라고 반드시 스스로 회복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의 스트레스는 이미 알아서 풀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만약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판단된다면 꼭 의학의 힘을 받고 치유하길, 당신을 회복하길 권한다.




[에필로그]


만성피로(부신기능저하) 진단을 받은 후 나는 회사로부터 한 달간의 휴직을 받았고, 그 한 달을 부모님께서 계신 외국에서 보냈다. 부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셨기도 했고, 한국에 있으면 계속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서, 몸만 출근을 안 하지 계속 전화를 받아야 하고 일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해외에서 한 달을 지내며 수면량을 꽤 늘리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건 뇌피셜이지만, 그때 나에게 수면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을 준 것 중 큰 하나는 햇빛, 즉 내 몸이 받는 일조량이었던 것 같다. 몸이 '아 낮이구나', 혹은 '아 밤이 됐으니 자야지'라는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이 받쳐준 것. 아무래도 회사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실 형광등만 쬐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런 부분도 부족했던 것 같다. (당시 월 근무시간이 250시간 가까이 됐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퇴사를 하고 투잡을 하는 프리랜서인데, 평균 주에 20-25시간만 일하고 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그리고 지금은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야 누가 불면증이었어?"라고 할 정도로 아주, 아주 충분한 수면량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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