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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ker Mar 22. 2023

#1. 하루에 12시간 이상 켜두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의 전원은 누가 꺼주지?

한 달 넘게 잠을 설쳤다.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처음으로 가게된 동네의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병원 복도에 있는 FHD TV 처음 샀을 때 설명서에 뭐라고 써있었는지 아세요?

하루 12시간 이상 켜두지 말래요. 그 이상 켜두면 고장난대요. 

근데 파시는 분은 웬만하면 10시간 넘기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제 수명대로 쓰려면 아껴서 사용해야죠. 

사람도 마찬가지구요."



그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수명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35년 동안이나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진료실을 나와 바라본 복도의 FHD TV는 아주 선명했다. 병원 진료가 끝날 시간인 6시 30분, 간호사분들은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켜놓았던 TV는 이제 곧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쉼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본래 만들어진 대로, TV가 하루동안 해낼 수 있는 범위는 거기까지다. 



스스로 전원을 끌 수 없는 TV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졌고, 테스트를 거쳐 세상에 나와 누군가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전원을 내릴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면 액정이 타버릴 때까지 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자기를 돌보는 사람들에 의해 매일 저녁 7시면 쉴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알아주는 누군가에 의해 쉼을 허락받는다. 복도를 비추는 TV의 선명한 화질이 어쩐지 슬퍼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또 외로워보였다. 의사선생님의 약력, 각종 병원시설에 대한 자랑과 홍보를 눈이 부실 정도로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액정이 타버린 줄도 모르고 스스로 끄지 못하는 TV랑 다를 것이 없었다. TV는 자의식이라도 없지, 나는 자의식이 있는 인간인데도 스스로 TV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미 화면이 검게 변해버린지 오래인데,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 나라는 존재.



그 날 병원에서 진단한 여러가지 검사결과는 모두 한가지 결론을 향하고 있었다. 우울증 또는 번아웃증후군이었다. 사실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할 때마다 깊은 늪 한가운데로 자꾸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한달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자려고 누워도, 자고 일어나서도 (물론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출근하러 나가는 길에도, 2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도, 회의실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도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느낌이었다. 이 기분에도 바닥이라는 것이 있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어떻게든 딛고 일어나볼텐데. 계속해서 추락하는 감각은 멈추지 않았다. 끝도, 바닥도 없이 추락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럼에도 이겨내보려는 의지는 중력에 가속을 더해 나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나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이미 포기했다. 부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기를. 내 손으로는 절대 끄지 못하는 이 전원을 누군가가 꺼주기를, 아니면 스스로 꺼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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