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lker Apr 02. 2023

#2. 기쁨도 고통도 없는 시간들

우울증 약물치료의 효과에 대하여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처방해준 알약은 지금 2-3mm 정도 되는 조그마한 약이었다. 약국까지 갈 것도 없이 병원 데스크에서 바로 지어주었다. 아침 1알, 저녁 2알씩 복용하라고 써있었다. 그동안 감기 때문이든, 진통소염제이든 먹어봤던 약들은 적게는 2-3알, 많게는 5-6알씩 들어있었는데 신경정신과의 약은 너무나 작고 또 적었다. 의사선생님은 이 약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OO님이 더 아래로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줄, 그리고 잠시동안이라도 나쁜 생각들이 번지는 것을 막아줄 약이라고. 


1주일 치를 처방받았다. 이 1, 2알의 약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아침 : 감각의 스위치 내리기



재택근무가 끝난 다음날 아침, 1알을 삼키고 출근했다. 너무 작은 알약이라 삼키는 느낌도 들지 않아서 과연 먹은건가 싶을 정도의 약이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1시간 남짓. 지하철로 이동하는 내내 평소처럼 약간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 드디어 잠실역에 도착했고 사무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동료들과 인사를 하고 노트북을 켜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조금씩 약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이 모든 상황이 꿈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그 아득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피곤하거나 졸린 것은 아닌데, 내가 느끼는 모든 오감의 자극들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현실감이었다. 상황을 감각하는 나와, 감각을 통해 판단하는 내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한참 번아웃이 심할 때는 상황을 감각하는 내가 느낀 괴로움이 곧 나라는 존재의 괴로움으로 간극없이 이어졌다면, 이제는 나라는 존재가 분리된 것 같았다. 감각하는 나는 약의 효과로 살짝 마비된 것 같았고, 그래서 들어온 감각을 판단하고 수용하는 나로 곧바로 전달되지 않았다. 휘몰아치던 불안과 추락감으로부터 분리된 나는 약하게나마 안전함을 느꼈다.  


하루종일 뭔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감당하기 힘든 세상의 가까운 쪽에 또 다른 나를 놓아두고, 아픈 나는 그 등 뒤에 숨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피할 곳은 없었고 내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내가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감각이 무뎌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의 일과를 해치웠고, 무방비상태의 또 다른 나를 지켜주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나니 하루종일 누군가의 등에 업혀있다가 온 느낌이 들었다. 한번도 발을 땅에 데어본 적이 없는 채로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첫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먹는 약의 효과를 이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타버린 신경에 더 이상의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뭔가를 덧대는 효과였던 것 같다. 쏟아지는 온갖 자극들로부터 제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한 마취같은 것이었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하루를 보냈다. 불쾌한 느낌은 없었지만, 일단 타버린 마음이 조금은 쉴 수 있게된 것 같았다. 이유없이 가슴이 욱신거리는 일은 적어도 없었다.



저녁 : 마음의 이불 덮기



번아웃 또는 우울증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밤이다. 낮 시간에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든 일이든 뭔가 교류하면서 자아가 구겨지는 느낌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시간에는 고스란히 견뎌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워낙 일에 몰입하는 성격이라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으면 자기 전에 꼭 한번씩 떠올리곤 했는데, 최근에 이직한 회사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 산더미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다보니 커리어는 물론 회사원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내게는 어마어마한 불안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머지 약 2알을 먹자 금방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면제를 직접 먹어본 적은 없던 나는 수면 효과가 있는 감기약 정도만 먹어봤었는데 우울증 약은 감기약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독한 감기약은 먹으면 머리가 무겁고 눈이 침침해지면서 잠에 들기 마련이었는데, 우울증 약은 마치 누군가가 나의 의식을 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져 어딘가에 머리를 대고 누워야만 할 것 같았다. 모든 생각과 감각이 앞을 향할 수 없을 정도로 깨어있기가 어려웠다. 잠에 들었다기보다는 의식의 전원이 잠시 차단된 느낌이었다. 밤이 되면 사납게 뒤숭숭하던 마음은 묵직한 이불에 덮여 그렇게 잠들었다. 


보통 밤에 자려고 눕게되면, 


(1) 그 날의 또는 현재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 (주로 회사 일) 이 먼저 떠오르고

(2) 이런 저런 해결책들을 생각해보다가 결국 답이 없다는 결론이 들고

(3) 차라리 지금이라도 새로운 일을 하는게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다가 

(4)그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하고


마침내 다시 (1)로 돌아가 고민하게되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이런 사이클은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라 2번만 돌아도 잠들 기운마저 앗아간다. 그런데 밤에 먹는 2알의 약은 그런 에너지소모를 막아주었다. 고민하는 의지마저 내려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에, 누워서 어떤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면서 넘기고 잘텐데,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 자체를 덮은 채로 잠에 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다운 것, 인간만의 것에 대한 생각


사실 나는 고통을 사랑해왔다. 고통만이 인간을 성숙시킬 수 있으며, 삶의 진실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해왔다. 고통을 별로 겪지 않은 사람들은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해왔다. 고통이 없는 이에게 나의 (과거의) 고통은 마치 훈장과도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우울증도 엄연한 하나의 고통이다. 물론 처음에는 내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받아들이기 전부터 지금까지도 우울이라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존재론적으로도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번아웃으로 인한 우울증을 겪기 전에는 마음의 병도 스스로 이겨내야한다고 믿었었다. 그러한 과정에 인간다움의 길이 있고 삶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신과 약을 복용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한 사람에게 고통을 줄여준다는 목적으로 기쁨과 슬픔에 대한 통각을 마취시키는 효과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병은 인간의 결연한 의지로는 이겨내기 어렵다는 것을, 모든 의지와 대척점에 있는 '우울'을 인간의 의지로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모순임을 알게된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외력과 내력을 추상적으로 나누어 모든 외력 (ex. 약물)을 제외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인간성은 내력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개념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삶을 이어가고자하는 원의에 달려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도 슬픔도 무뎌지게 만드는 약일지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이어가고자하는 원의가 중요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인간다운 것이 생겨난다. 스스로의 내력으로 버티지 못하고 외력에 의지했다고 해서 그 점만으로 인간답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내력의 빈약함을 인정하고, 외력에 의지해서라도 자기를 유지하고, 존속시키고, 살아가게끔 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이다.


1주일 가량 우울증 약을 먹으며 나의 인간다운 부분들이 소거되는 기분이 들었다. 전처럼 무언가에 기쁘지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푹 꺼지는 기분 또한 없었다. 내 감정이라는 차트가 움직이는 상단과 하단이 좁아졌다. 크게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은 채 평균적인 수준의 감정과 반응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존재해야했다. 이미 타버린 마음으로는 일으켜지지 않는 욕망이다. 마취된 마음으로라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가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하루에 12시간 이상 켜두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