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호와 203호 박스 환상의 콤비, 피터지게 방어하는 202호
* 이 글에는 바퀴벌레 사진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처음으로 바퀴를 죽인 것은 혜화의 옥탑방이었습니다. 대략 엄지 크기의 성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항마력이 한참 달렸습니다. 죽이긴 해야겠는데, 터질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 박스를 집었습니다. 박스에 테이프를 접착면이 바깥으로 오도록 돌돌 감아서 들고 갔습니다. 끈끈이트랩처럼 바퀴를 테이프에 붙여 체포한 뒤, 박스째로 버릴 샘이었습니다. 하지만 왜인지 바퀴는 몇 번을 내리쳐도 테이프에 붙지 않았습니다. 결국 타격 KO에는 성공했으나, 사체는 직접 주워 버려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바퀴 표면을 덮고 있는 키틴질과 털 때문에 미끄러울 수 있다 하더군요. 미끄러운 놈이 벽은 왜 쓸데없이 잘 타는 것인지, 생물이란 참 신비합니다. 아무튼 이 집에서는 거대 바퀴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자주는 아니라서 대부분의 일상에서 그의 존재를 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사단장님의 부대 방문처럼 잊힐 즈음 한 번씩 발생하는 깜짝 이벤트였습니다.
바퀴로부터 100% 자유로운 집이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독립 후 대부분 빌라에 살았습니다. 적어도 한두 번은 바퀴를 만났던 것 같은데, 대부분 약을 놓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 다시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놓고 연막살충을 해도 끝없이 바퀴가 나오는 집도 있었습니다.
2021년 1월에 수원의 한 빌라 원룸에 입주했습니다. 처음 바퀴를 발견한 것은 5월쯤입니다. 저는 202호에 살았는데, 203호 사시는 분께서는 항상 집 앞에 락스, 락퐁 등 청소 용품이 들어있는 종이박스를 두셨습니다. 아마도 관련 일을 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5월 언젠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박스 위에 엄지만 한 바퀴가 떡하니 있었습니다. 곧 놈은 박스의 뜯어진 틈으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위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이 뛰어난 편인데요, 왜인지 그때는 일단 문제를 외면하기로 합니다. 끔찍한 상상임이 분명하니, '어딘가서 들어온 한 마리일 뿐일 거야...' 하고 믿는 쪽을 택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6월쯤, 문을 열고 나가는데, 박스 위에서 두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이번에는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했습니다. 일단 신발장에 처박아 놨던 독먹이살충제를 꺼내 들고 복도로 나왔습니다. 먼저 203호 박스 안을 내 눈으로 보고, 끔찍한 상상이 현실인지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한 일분을 가만히 서서 있었습니다. 마치 이미 불합격일 거라 예상하면서도, 시험 결과를 확인해야만 할 때의 기분이랄까요. 마침내 박스의 뜯어진 구멍 안으로 플래시를 비추었을 때,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매끈한 등껍질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박스 안(203호 아저씨, 죄송합니다)과 주변, 그리고 빌라 계단과 복도 구석구석 독먹이살충제를 짜 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출근길, 독먹이를 뿌려놓은 곳에서 수십 세대 바퀴 가족의 아침식사를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바퀴들의 파티 현장 주변에는 이미 독먹이를 먹고 죽은 바퀴들의 사체가 즐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만 해도 몇 번 독먹이를 놓으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여태 그랬으니까요.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밤에는 약을 놓고, 출퇴근길에 바퀴 사체를 쓸어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퇴근길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혹시나 새끼 바퀴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출입도 자제하게 됐습니다. 삶의 질이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 놓고 사체 쓸고를 한 달. 날은 점점 더워지고 바퀴는 더 빠르게 증식하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건물 주인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 건물에서 바퀴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한 달 동안 건물 여기저기에 용하다는 약을 치고 사체를 쓸어내길 반복하는데 사라질 생각을 안 하네요. 그리고 203호 앞 박스에 바퀴가 터를 잡은 것 같습니다."
그제야 203호에서 바퀴집을 확인하고 박스를 모두 치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놈들의 본진이 201호였던 겁니다. 집주인을 통해 201호 세입자가 얼마 전 집을 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주인분께서 건물에 찾아오셔서 빈 201호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싱크대, 베란다, 화장실, 없는 곳이 없이 바퀴 사체로 가득했습니다. 결코 빈집이 아니었습니다. 집이 완전히 바퀴에게 점령당한 것입니다. 박스가 끝이 아니었다니, 다시 눈앞이 아찔해왔습니다. 집주인께서는 구석구석 숨은 바퀴를 쫓을 수 있도록 201호, 202호에 *연막살충 처리를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때문에 옷, 식기 등은 비닐로 덮고 하루 정도 집을 비워 연막 살충 조치를 했습니다.
그 전쟁을 치르면서도 집 안에서 바퀴가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연막살충 효과로 201호에서 튀어 왔는지, 드디어 집 안에서도 놈이 나왔습니다. 연막 살충 이틀 후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날도 퇴근 후 책상에 앉아 작업 중이었는데, 불 켜진 환한 방에서, 성충 바퀴가 책상 서랍장 뒤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해 버립니다. 아, 이때 정말이지,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던 모든 이성의 끈을 놓쳐버렸습니다.
집에서 바퀴 한 마리 정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리의 출현은 어쩌다 한번 나온 바퀴와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흡사 코로나와 같은 기세로 201호와 복도를 점령한 바퀴, 항복하고 떠난 201호 세입자, 그리고 202호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나. 집 안에서 바퀴가 나타난 순간부터, 202호는 저의 공간이 아닙니다. 짐을 보관할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있는 곳, 길바닥에 누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누이는 곳. 쉼과 안정을 주는 공간으로서의 집의 의미는 상실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지독하게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이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도 "바퀴 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라고 하셔서 저도 모르게 화가 터져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께서는 아마 어쩌다 한 번쯤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셨을 겁니다.
암튼 저는 그 길로 바퀴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선언하고 이사를 가기로 합니다. 천만다행으로 6개월 월세 계약이 끝나고 묵시적 연장을 하고 있던 상태라 바로 집주인께 말씀드리고 집을 뺄 수 있었습니다. 혹시 바퀴 알이 있을까 봐 가구는 모두 버렸습니다. 애초에 좋은 것을 들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중개인께 바퀴는 절대 없는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월세집을 구해서 이사를 나갔습니다. 이전 집보다 월 10만 원이 비쌌지만, 안전한 공간을 위해서 치를만한 값이었습니다.
새로 이사 간 빌라는 건물 내 모든 세대가 한 주인의 집이었습니다. 주인이 같은 건물에 거주하셔서 관리도 철저했습니다. 정화조 청소도 매년 했습니다. 계약할 때도 바퀴벌레 나올 시 업체 불러 조치해 주시는 것으로 특약을 넣었습니다. 아무렴, 같은 건물에 사시는데 그런 사태를 그냥 보고만 계실까요. 저는 저 대로 입주하자마자 집 곳곳에 독먹이살충제를 놓았습니다. 이 집에는 2년을 살았는데 딱 한번 죽어있는 놈을 발견한 게 전부였습니다. 1층에 횟집이 있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이전 집은 북향이라 침침했는데, 새집은 남향이라 하루 종일 볕이 들었습니다. 바퀴가 덜 나온 게 이 덕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집이 환하니, 지독했던 지난 몇 달의 기억이 씻겨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2년 뒤, 지독했던 202호의 기억을 잊고 또다시 바퀴 소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번에는 전세 2년 계약이라 도망도 불가능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퀴가 나오는 원인을 분석하여 하나씩 처리해 나갔습니다. 감사하게도 이전의 전쟁처럼 바퀴가 폭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약 20개월 동안 조금씩 꾸준히 발견됐습니다. 성충은 대략 20마리, 새끼는 50마리 정도 본 것 같네요. 2편에서는 10군데 이상의 예상 유입로를 찾아내며 꾸준히 치러진 장기전을 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될만한 내용으로 풀어보겠습니다.
* '독먹이살충제': 독일 바이엘사의 '맥스포스 셀렉트겔'이라는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이미 바퀴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셨다면 아실 겁니다. 세스코 등 방역 업체에서도 다 이 제품을 사용할 정도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식사와 사망 현장을 모두 목격했으니 확실히 검증된 셈입니다.
* '연막 살충': 연막을 집 안에 태워 바퀴를 쫓는 방법입니다. 독먹이 약, 뿌리는 에프킬라 등은 가구 뒤, 싱크대 뒤편 등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설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구석구석에 숨은 바퀴까지 쫓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단, 연기 때문에 화재로 오인할 수 있어 소방서에 미리 알려야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