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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Apr 25. 2024

<파묘> 생각..


최근 블로그에 부쩍 글을 많이 올리는 것 같다. 왜냐하면 큰 덩어리의 무언가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듀나였던 것 같은데, 소설이 안 써지면 '대하소설'을 쓰겠다는 계획을 잡으라고. 큰 덩어리의 무언가를 써야하면 사소한 무언가가 쓰고 싶고 오히려 잘 써진다. 물론 나의 큰 덩어리는 가짜 계획이 아니라 진짜 계약이고 그것이 하루하루 나를 압박해오는 것 같지만.. 괜찮다. 그건 미래의 내가 감당할 테니까. 사실 블로그를 많이 쓰는 건 올해의 계획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좀 《공식》 비스무리한(?) 지위(?)가 되고(?)나서 부쩍 안 쓰는 내가 좀 싫더라고...아무튼 "(더콰이엇 톤으로) 우리는 언젠가 다시 블로그로 돌아갈 것"이니까...



아무튼 종종 가만 두면 휘발될 생각을 모아두거나 아님 그냥 휘발시키고 싶어서 글을 종종 남길 생각이다. 이제 그냥 일상도 올리고! 사진 2000개씩 포스트도 올리고 그럴 거임.



       


일단 <파묘> 생각을 좀 했다. 영화는 그냥 그저 그랬고 거기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캐릭터가 확실하고 거의 3-40분의 분량으로 나눌 수 있는 것--바로 '시리즈의 감각'이 <파묘>에서 기인한 생각을 오래하고 있다. <파묘>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모 트위터리안이 영혼의 속인주의와 속지주의가 <파묘>에 있고 그렇다면 이름 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원혼은 어디로 갈까? 라고 지적한 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누구라도 멈칫해야 마땅한 동시에 외곽에 있는 그 장면에서 응당 <파묘>의 비평이 시작해야한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장재현이 그 장면을 넣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의식적인지는 모르겠다.


(<검은 사제들>은 머리를 빡빡 밀어도 사슴 같은 박소담의 얼굴 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장재현은 여느 오컬트 감독과 마찬가지로 신적 영역의 모호함을 사용한다. 저 거대한 절대자의 위치에서 보면 인간 기준의 선/악이나 이성은 별로 쓸모가 없다. 근대적 이성과 규율은 무력하다. 이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종교인의 힘을 빌린다. 그들은 절대자의 위치에 잠깐 서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인은 '잠깐' 서거나 '얼핏' 볼 수 밖에 없기에,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더구나 하나의 문제도 종교의 패러다임에 따라서 해결 방식이 달라진다. 악령이라고 칭하는 것을 기독교와 불교는 다르게 해결해야 한다.


장재현은 이 모호함과 해결 방식의 다중성을 서사의 전환점으로 사용한다. 근대적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나빠 보이는 것을 짜잔! 종교인들이 해결한다. 그렇지만 해결하는 패러다임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반전!) 그러면 그 문제를 다시 탐구하면서 그 문제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파묘>도 이렇다. 

1차 패러다임: 잘못 묻은 묘가 있다. 유령이 나온다. 태워서 해결한다.

2차 패러다임: 엥 첩장이었다. 괴물이 나온다. 상성 무투로 해결한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런 식이다. 절대적 영역에서 우리가 '악'이라 칭하는 것, 이 있고 이걸 종교적 패러다임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종교적 이해가 깊어지면서 우리가 '악' 혹은 '문제'라 칭했던 것이 점차 규명되고 해결된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의 감각을 갖춘 <파묘>에서 이름 모를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 뉴스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새로운 종교적 패러다임으로 해결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만들었다. 베트남? 필리핀? 유령이 등장한다. 그러면 베트남? 필리핀? 종교를 가져와서 그 문제를 또 해결하면 된다. (너무나 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걸맞는 기획이 아닌가!!) 그러니까 장재현에게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은 해결 가능한 문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서사의 구도 안에서 "(미래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므로 그런 장면은 넣고 싶고, 넣음으로서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싶은 (무)의식이 있었으리라. 


내가 이런 (무)의식을 확신하는 이유 <파묘>의 박력이다. 내 기준으로 <파묘>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는 마치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박력이 있다... 바로 '국가영화'가 되겠다는 박력. 우스갯소리로 NL 영화라고 하는 게 아니다. <파묘>는 식민지의 폭력을 종교적으로 해결함으로서 새롭고 [정상적인] 근대를 맞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식민주의와 아주 함 싸워보겠다!!는 박력이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의 폭력을 해결하고 [정상적인] 근대를 이룩한 <파묘>의 결말에서 남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다. 아직 '남한'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6.25 전쟁 중에 죽은 미국의 악령들도 해결할 때가 올 것인데...) 장재현은 '남한'의 외국인 노동자-혼령조차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 있는 게다.. <파묘 2: 낙동강의 악마>, <파묘 3: 비닐하우스의 마누아녹>..


아무튼 이런저런 것과 별개로 장재현의 이런 방식--악을 종교적 패러다임으로 계속 해결해나가는 방식--을 나는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성향이겠지만 내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허무가 나한테는 낫다. 그게 정직하다. 위의 그림처럼 결국에는 '악'이라고 우리가 칭하는 것의 여백은 어떤 종교적 패러다임을 갖다 붙여도 남을 수밖에 없다. 독실하지 않다면(?)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할 터이다. 


그러므로 나는 장재현의 방식이 거듭될수록, 영화가 쌓아올린 것을 모두 포기하고 관객을 우롱하고 조소하며 결국에는 미궁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곡성>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재현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은 <곡성>이다. 악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거듭될수록, 규명되지 않는 악의 공포가 우리를 매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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