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umal Nov 18. 2020

나의 취미생활 원정기

퇴근 후 뭐 하지?

퇴근 후 집에 있는 시간은 참으로 즐겁다. 무엇을 하기에 즐겁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즐겁다고 하겠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한심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즐기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의 한심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다. 한심한 시선을 두려워할 거였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리가.


무언가를 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인생의 기쁨 중 하나겠지만 매일매일, 매시간 성취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멍 때리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중독성이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더 가만히 있고 싶어진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마니가 된 지 오래.


퇴근 후 방구석에 틀어박혀 가마니로 활동하게 되면 자연스레 부모의 시름을 듣는다. 부모라면 자식에 대한 걱정이 끝이 없기 마련이다. 우리 딸 초등학교에 가서 적응은 잘할는지, 우리 딸 학교에서 성적은 잘 나올는지, 우리 딸 대학은 갈는지, 우리 딸 취업은 할는지, 우리 딸 결혼은 할는지. 그리고 가마니가 된 딸에게는, 우리 딸 왜 저러고 살까.


흔히들 머리가 크면 집을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부모님과 부딪히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 구조라는 게 머리가 컸다 해서, 부모님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해서 밖에 나가 살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 당장 휴대폰에서 ‘다방’과 ‘직방’만 검색해 봐도 엄마, 아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영원히 나갈 수 없으니 자주 나가기로 한 것이다. 또한 아무 이유 없이 나가서 시간을 죽치는 것보단 무언가를 배우면서 취미생활을 즐기는 게 좋을 듯했다. 일상에서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은 사실 좀 드물다. 안 친한 사이에서 상대방과 친해지려고 노력할 때 예의상 던져 보는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이력서를 처음 만든 이가 ‘뭐 적당한 게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 취미 정도면 무난하지.’라며 만들어 넣은 칸이겠지. 누군가 취미를 물어오면, 나는 영화 감상이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자주 보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관은 안 좋아해서 취미생활을 즐길 때면 모니터나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을 때가 많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면 취미생활을 즐기는 중이라고 해도 ‘그래?’라는 눈빛보단 ‘또 해?’라는 눈빛을 받을 때가 더 많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나가서 할’ 취미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어다.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영어요.”라고 답하기 위함은 아니다. 좀 재수 없어 보이지 않나. 퇴근 후 영어 학원에 다니자 직장 동료들이 이직을 준비하느냐 물어왔다. 물론 그런 건 아니고, 그저 해외여행을 가면 좀 더 능숙한 요구를 하고 싶었다. “창문 있는 방으로 바꿔줄 수 있나요?” 뭐 이런 거. 그렇게 저녁 7시 수업을 등록했다. 영어 회화 학원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영어에 능숙한 편은 아니라 기초반에서 두 번째로 낮은 반을 택했다. 참 희한한 게 영어는 유치원 때부터 배웠건만 누군가 나에게 영어를 잘하냐고 물으면 못한다고 답한다. 기본적인 말은 알아들으면서도 전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못한다, 못한다, 하며 반 선택도 기초반을 택했다. 하지만 막상 수업을 들으니 꽤 쉬웠고, 배움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자 두어 달 만에 재수강을 관뒀다. 이것이 바로 나의 첫 취미생활 실패기.


두 번째 취미는 게임이었다. 방구석 가마니로 복귀한 셈이다. 취미란 본래 전문적으로 하는 게 아닌,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다. 프로게이머가 될 생각은 없고 오직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으니, 이 얼마나 취미에 어울리는 활동인가. 내가 선택한 게임은 심즈였다. 심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게임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는 셈이다. 일명 ‘심’이라고 불리는 인간을 만들어 집을 짓고, 가구를 채우고, 직장에 다니고, 연애를 하고, 가족을 이루고, 죽기도 한다. 물론 이토록 평범한 일상이라면 게임할 맛이 떨어진다. 불륜이라든가, 맞바람이라든가, 일상에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면 속 세계는 가상 세계이지 않나. 일상이 힘들면 가상 세계에 가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은 법이다.


그런데 가상 세계에 가서도 일상생활의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 심은 회사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다가 퇴근 후에는 승진을 위해 책 읽기와 기술 쌓기에 매진한다. 결국 승진을 해서 휴가일은 늘어나는데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해 휴가일은 사용하지도 않은 채 나이가 들더니 늙어 죽는다. 아, X발. 취미생활 중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가장 힘들다. 나도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한 가지 다행인 건, 스타크래프트에 ‘쇼 미더 머니’가 있다면 심즈에는 ‘마더로드’가 있다. 인생에는 치트키가 없지만 가상 세계에선 치트키가 가능하단 것. 때문에 일상이 힘들 때마다 가상 세계로 들어가 치트키를 사용하며 취미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치트키의 남발은 게임의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게 문제였다. 막상 평탄한 흐름이 이어질 땐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 마치 인생인 양 아이러니하다. 어찌 됐든 치트키 남발로 가상 세계에 대한 애정이 식었고, 나의 두 번째 취미생활도 끝이 났다(물론 주기적으로 가상 세계를 찾아 떠난다). 그다음 내가 선택한 새로운 취미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의외일지도 모르겠다.


독서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약 80년 동안 세상만사 모든 것을 겪을 수는 없는데, 다 겪을 수 없는 감정이나 경험을 충족해주는 활동이 독서라고 본다. 지혜를 얻는다는 것.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물론 나도 다독하는 사람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 후에는 책 읽는 게 일이 돼버린 나머지 더 멀어졌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책 추천은 해도 독서를 권하진 않는다. 그래도 퇴근 후에, 더 이상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 한 권의 책을 펼칠 때가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때도 분명 있다. 그 순간은 꽤 누려볼 만하다. 다음 장이 궁금하고 어떠한 이유로 책장을 덮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아쉬운 순간. 일주일에 몇 권, 한 달에 몇 권, 이렇게 스스로를 테스트할 필요도 없다. 그저 책 읽는 즐거움을 또 한 번 느끼고 싶을 때, 그때 읽으면 된다. 그게 바로 취미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