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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

묻고 덮어두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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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창비, 2024


중수(重修)는 손질하여 고치는 것, 중창(重創)은 다시 짓는 것, 재건(再建)은 크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18쪽). 그러면 수리는 무엇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수리(修理)는 "고장 나거나 허름한 데를 손보아 고침"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수리와 중수는 무엇이 다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중수는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여 고침"이라는 쓰여 있다. 수리는 더 넓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수리는 곧 이치(理)를 고치는(修) 일이니까. 그렇다면 수리는 쓰러진 건물의 주춧돌을 다시 놓고 벽과 대들보와 기둥을 다시 세우고 고치는 작업을 넘어 사람과 세상이 놓인 토대를 올바르게 다시 세우는 일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바로 그런 수리의 기록, 이치를 바로 잡는 작업의 기록이다. 창경궁 대온실이라는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과 삶의 토대를 되살리는 과정의 기록이다. 소설 속 건물과 사람의 관계는 직관적이다.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 상하고 훼손되듯이 사람도 세파를 맞아 가며 삶을 견디다보면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지기에 수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상처와 공백을 영영 숨기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파내여 비어진 공간은 겉만 아무리 그럴싸하게 가려봐야 언젠간 무너지게 마련이다. "상처로 부스러진 사람들"(335쪽)의 삶은 그렇게 천천해 망가지며 무너져 간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 195쪽.



그런데도 일단 묻히고 가려 있으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겨지곤 한다. 다시 파내고 처음부터 기반을 바로 잡는 일은 너무나도 어렵고 복잡하고 때로는 알고 싶지 않았던 내막까지 직면해야 하는 일이니 지금 겉보기에 괜찮으니 이대로 두자는 유혹이 또는 지나간 일을 굳이 파헤질 필요가 없다는 압력에 부딪히곤 한다. "지나간 일은 덮어 두자"라고 습관처럼 내뱉는 말은 곧 수리를 거부한다는 의미다. 주춧돌과 대들보와 기둥이 상한 상태로 간신히 버티다가 무너지는 꼴을 방관하겠다는 뜻이다. 상처를 품은 당사자마저도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195쪽) 수리하기보다 묻기를 선택한다. 그 논리로 얼마나 많은 기억과 사람과 삶이 공동(空洞) 속에 묻혀 사라졌을까. 대온실 아래 묻힌 정체불명의 유골처럼. 누군가 찾아 헤매지 않았다면 발견되지 않았을 하숙집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나'의 트라우마처럼.


수리는 싹 밀고 이전 건물은 없었던 듯이 한 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그렇게 새로 지을 수 없다. 수리하려면 무너지고 쓰러진 건물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옛날 설계도를 구해 샅샅이 살펴 원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사람의 수리도 과거를 다시 되돌아볼 때 시작된다. 다치기 이전을, 무너지기 이전을 기억할 때 시작된다. 이 소설의 발굴과 복원을 주제로 삼은 것은 발굴과 복원이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과도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물을 복원하려면 숙련된 손길로 파편 하나하나를 모아 섬세한 붓질로 흙을 털어내야 하듯이, 마음도 회복하는 것도 깨진 마음의 조각들을 모으는 데서 시작하니까. 과거를 흙 속에 묻힌 채 두지 않겠다는 결심. 흙 속에서 먼지가 되어 잊히도록 두지 않겠다라는 의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행위는 곧 내면의 고고학인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대온실 수리 보고서』, 209-210쪽.




현실에서는 모두가 그런 특권을 가지지 못한다. 모두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다시 들릴 수는 없다. 모두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다시 기억될 수는 없다. 모두의 상처가 소설처럼 다시 치유될 수는 없다. 모두가 소설처럼 자신의 삶과 과거를 되돌아볼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 트라우마의 상처가 너무 깊어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은 간신히 덮어놓은 흙을 파헤치고 기틀을 바로 잡기는커녕 상처를 다시 덮지도 못해 더 큰 고통에 빠지곤 한다. 묻히고 잊힌 과거를 꺼내어 빛을 보게 하기 위해 기꺼이 열정을 바치려는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얻는 일도 드물다.


창경궁 대온실은 수리되었어도 조선시대 다섯 궁궐의 얼마나 많은 전각이 수리되지 못한 채 사라졌는가. 얼마나 많은 집단 학살과 전쟁과 범죄의 희생과 기억이 망각되고 매몰되고 존재할 권리를 부정당하는가. '기억 전쟁'에서 항상 피해자가 승리하지는 않는다. 현실은 소설과 같지 않다. 현실에서 사람은 쉽게 수리되지 않는다. 사람이 수리되는 이야기는, '소설'일 뿐이다. 주인공이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줄거리의 이야기가 인류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되고 반복되어온 이유는 그런 일이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꿈꾸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이 그럴수록 이런 소설이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이 소설은 결국 고대부터 현대까지 변함 없이 사랑을 받아온 환상의 한 변주다. 사람이 다시 서고 이치가 바로 잡히며 '나'가 상처를 회복하는 고전적 주제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은 '나'에게 영웅의 지위나 능력을 주지 않는다. '나'는 이 땅의 많은 약자와 상처 받은 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소설이 고전적 주제를 반복하는듯 보이면서도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의 내면을 설계도를 살피듯 샅샅이 들여다 보고 건물을 다시 세워 세상에 내보이듯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마음을 세상에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다른 의미로 '현대적' '지판타'다. 고통 받는 이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주인공의 위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고, 끝끝내 아픔이 치유된다는 점에서 '판타지'다. 나 역시 인간이기에, 그런 판타지는 내게도 도파민 터지는 이야기이자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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