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간의 남미 여행이 끝내며
25일간의 남미 여행이 끝났다. 앞에 있었던 3주가 조금 넘는 멕시코 여행까지 하면 한국을 50일 넘게 비운 거다. 이 정도로 오래 한국을 떠나있던 게 대학생 때, 그러니까 싱가포르 교환학생 시절과 미국 UCLA 섬머세션 정도이니 최소 7년만에 난 다시 한국을 떠나서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하는 많은 행동에는 나름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에서 난 아무 것도 얻지 않는 게 목적이었다. 거창한 인생 목표의 재설정이나 심리적 변화, 인생이 뒤바뀔 깨달음이나 경험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만약에 남미 여행으로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 왔어야한다. 여행은 그냥 좋은 걸 보면서 우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우와! 하면 그만이다. 생각해보면 교환학생, 섬머세션 모두 잘 노는 게 가는 목적이었고, 무언가 거창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을 얻어서 왔다. 이 정도면 그때도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던 듯.
단, 여기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조금이라도 어릴 때 오는 건 좋은 것 같다는 점이다. 나이 먹고 회사 다니다 나와서 꼰대 같은 소리한다고 보일 수도 있고 특별한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또 딱히 없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새로움을 다름이 아닌 새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듯. 사실 그냥 난 그 때 뭐했나 자괴감이 들어서 하는 소리이거나 내가 이제 가질 수 없는, 흘려보내도 아름다울 것 같은 몇 년의 시간이 그저 부러워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차피 몇년 전 고민, 몇년 전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는 나라면 특히 더. 그러나 이 글을 볼 페이스북 친구들 중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함정. 게다가 학생이면 입장료도 더 저렴하다. (나도 멕시코에서 만든 가짜 국제학생증 덕분에 여기저기서 할인을 받았다.)
주위에서 결과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나를 보며 내가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에 보헤미안 마인드를 가진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만약 내가 저기에 해당되었다면 아마 여행이 50일이 아니라 5개월이나 500일쯤 되었어야했다. 난 그저 퇴사하고 붕 뜨는 시간에 기분전환이나 리프레시 정도의 느낌으로 이 여행을 접근했기 때문에 25일에 남미를 가로지르는 말도 안되는 일정을 소화했다. 정말 스쳐지나가는 중에 구경하는 수준만 가능해서 내가 보고 싶은 포인트 5개만 골라서 여행을 다녔다.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이라기보단 불안한 30대의 여행이라는 표현이 맞고, 길게 가면 뭔가 불안해서 50일 정도로 일정을 줄였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돌이켜보면 굳이 내가 지금 한국에 돌아갈 필요는 없어서 여행을 연장해도 별 문제는 없었고 연장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난 어쩌다보니 난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도 리프레시는 충분히 된 느낌이라 이제 여의도 cgv에서도 영화를 봐도, 여의도에서 저녁 약속을 잡아도 괜찮을 듯. 물론 굳이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여튼 일주일만에 짠 계획으로 여행을 다녔고, 그나마 한국에서의 여행 정보 검색은 급한 불이었던 앞쪽 멕시코 여행을 짜느라 바빠서 뒤쪽인 남미는 거의 백지상태였다. 내가 제대로 남미 여행 계획을 짠 건 페루에 도착하고 와라즈에서 고산병 적응한다며 빈둥거릴 때 숙소에서 열심히 인터넷 검색과 두 권의 가이드북을 뒤적거리면서 귀국 날짜에 맞춰 일정을 짠게 다였고, (아 아킬포 호스텔에 태극기 걸어놓으신 카이스트 김현준씨, 그 태극기 아직 잘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제대로 몰라서 마추픽추에서 버스타고 내려오면서 나에게 하루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뭘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여행 자체가 크게 준비되어있지 않았던 지라 이번 여행은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실제로 바로 그 쿠바 여행 이후로 난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지라 (물론 이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여행을 다녔던 시기가 방학에 여행다니는 대학생들의 루트와 겹치지 않는 비수기였기때문이다.) 여행 숙소조차 체크아웃하는 날 숙소 와이파이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사실 다른 한국 여행자들은 남미사랑 카페에 질문을 올리고, 800명짜리 카톡방에서 여러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남미 여행을 다니는데, 덕분에 장기로 최소 몇 달 단위로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교류도 많고 나름 자기들 사이에서 유명한 여행자들도 있고, 그 중에는 더러 유명 블로거나 여행 에세이 저자도 있다. 물론 난 여행 준비할 때 여행 에세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리고 특히 몇몇 부부여행자들은 많이 유명하다. 그러나 난 워낙 성격이 이상한지라 정말로 혼자 다닌다며 이런 거 없이 아싸처럼 그냥 멕시코에서 들은 이야기들과 블로그들을 검색하며 혼자 여행을 시작하고, 한국인들이 많이 머문다는 호스텔에서 물어보는 방법으로 여행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어째 소통할 기회가 딱히 없었다. 그렇게 한국 사람이 많다는 쿠스코의 호스텔에서도 난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을 볼 기회가 잘 없었다. (왜냐하면 일정이 빠듯한 나는 쿠스코에서 투어 때문에 새벽같이 나가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느긋하게 일주일 넘게 지내면서 천천히 구경하면서 밤에 술을 마신다.)
그래도 필요할 때 적절한 수준의 정보와 도움은 얻고 다녔고, 이 과정에서 때로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마추픽추 아래 마을인 아구아스칼리엔테스에 밤 늦게 도착해서 다음날 마추픽추 입장 예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을 때는 현지인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경찰서에 가기도 했다. 그리고 적절한 대처법을 안내받아서 추후에 관광경찰과 함께 다시 여행사에 가서 내가 다시 지불했던 돈을 다시 받아냈다.
그래도 정보는 한국어로 얻는 게 제일 편한지라 길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주워듣고 도움을 받았고 특히 쿠스코에서 우유니까지는 정말 큰 도움을 받으면서 여행을 했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만났던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여행을 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인데, 아마 우유니에서 제대로 투어사를 예약하지 못했거나, 별을 보면서도 별을 보기만 하고 사진으로 제대로 담지 못하면서 보기만 하면 되다고 정신승리 마인드로 시간을 보냈을 거다. 우연히 코파카바나를 향하는 버스에서 만들어진 인연으로 난 우유니에서 10명의 한국인 그룹에 속해서 여행을 다녔고, 그 그룹은 엄청 좋은 사진기와, 숙달된 밤사진 찍는 노하우, 그리고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포함된 그룹이었다는 걸 첫 투어에서 깨달았다. 특히 2번이나 스타라이트 투어를 이미 다녀왔던 분과 인생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투어 몇시간 전부터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며 적절한 사진 구도를 잡아내려던 분들의 노력에 프리라이딩했던 나는 덕분에 편하게 투어사와 투어 시간이 조정된 딜에 편하게 여행했고, 인생사진은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과분하게 많은 사진을 찍고 기쁘게 우유니를 빠져나왔다. 덕분에 나는 혼자 따로 투어를 하러나왔을 때도 재밌게 다른 사람들 사진 찍은 걸 도와줄 수 있었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실제와 반영의 구별이 사라지고,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어지는 마법같은 우유니에서 기분 좋은 기억만 남았다. 물론 날씨는 나를 한없이 기다리게 만들고 하늘은 다시 우유니에 가야할 이유를 만들어줬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추픽추에서 우연히 시작된 재밌는 인연은 동행 비슷하게 이어져서 덕분에 쿠스코와 우유니 시내에서도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역시 여행은 누구와 만나는가, 어떻게 함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혼자 떠난다하더라도 각자 나름의 동행을 구하고 일정 사이에 섞이면서 여행하는 경우를 남미에서는 자주 볼 수 있어서 더 그런 듯.
덤으로 cero 수준이었던 스페인어도 이제 대충 여행용 바닥 스페인어 수준까지는 올라서서 숫자도 말할 수 있고 길거리 스페인어 의미도 어림짐작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도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50일만에 이 정도까지 되는 걸보니 한국 어머니들이 왜 일단 조기유학을 보내는지, 언어 학습환경에서 immersion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영어는 역시 생각보다 쓰일 일이 많다.
이제 진짜 여행이 끝났다. 때로는 멘탈에 작은 스크래치가 생길 때도 있었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혀 멍해질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재밌고 후회없는 여행이었다. 이제 다른 건 모르겠고, 한국 가면 함께 우유니를 여행했던 사람들과의 카톡 채팅창으로만 보던 겉절이랑 짜장면이랑 김치부침개를 먹고 싶다. 이제 10시간 비행했으니 14시간만 더 비행하면 서울이군. 오늘 아침은 in-n-out을 먹을 수 있길 바랬는데 개장시간을 보니 실패다. 이제 turista가 아닌 진짜 백수 생활 시작이다. 빨리 운전면허나 따야지.
덧. 멕시코 여행을 마무리지으면서 고민했던 멕시코 여행을 정리하는 사진 한 장은 와하까의 시장 한켠의 고기구이골목의 풍경으로 하는 걸로 정했다.
덧2. 여행 좀 다녔다고 하면 남미는 다녀왔어야지 하는 이른바 '남미부심'에 관해서도 딱히 남미여행이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장시간(이라면 12시간 이상) 버스로 이동하면서 길에서 하는 고생이나 3000m 이상 고산지대 적응 때문에 하는 고생이지, 이제 남미도 돈과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여행을 할 만하다. 특히 부족한 정보도 이제 한국어 블로그만 보더라도 남미 여행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많고, 거기에 여행을 다니면서 얻는 정보와 카톡 채팅방, 론리플래닛이나 트립어드바이저까지 본다면 깜깜이 여행과 남미는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 듯. 두 달짜리 방학 여행지로 남미가 뜨고, 남미 가이드북과 에세이가 잘 팔리기 시작한 것을 보더라도 남미는 이제 접근 가능한 보통 여행지가 된 듯하다. 물론 치안은 예외다. 종종 답이 없는 경우가 있어서 난 마지막 리우와 상파울루에서는 사람이 많거나 갑자기 누가 튀어나오면 깜짝 놀라서 뛰어다녔다. 물론 그 전 아르헨티나까지는 굉장히 느긋하게 다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