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유서재 ‘첫서재’의 맞은편으로는 오래된 언덕이 봉긋 솟아 있다. 퇴근할 때 혹은 휴일이면 종종 산책하러 들르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언덕길을 망대골목이라고 부른다. 꼭대기에 낡은 망대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망대는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높이 세운 탑이나 건물을 일컫는데, 그런 기능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키가 낮아 보인다. 요새 건물 삼사층 높이 정도일까. 가까이 가보면 문에는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고 벽면은 하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동네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지금은 방치된 망대지만 몇십 년 전까지는 꽤 유용했다고 한다. 언덕마을에 다닥다닥 집이 붙어 있다 보니 화재 위험이 커서 소방관들이 감시하러 드나들고, 근처에 교도소가 있어 재소자 감시용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한때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어서 이곳에 망대를 세웠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지대만 놓고 보면 여전히 그렇지만, 바로 뒷동네에 거대한 병풍처럼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까닭에 자연이 다져놓은 그 높이가 초라하게만 보인다. 망대 주변으로는 낡거나 버려진 집만 즐비하다. 망대도, 이 마을도,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골목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데 만약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유물로나마 존재하던 망대는 완벽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동네 이름도 더 이상 망대골목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차피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으니 사라져도 문제없는 것일까.
망대까지 오르는 길을 걷다 보면 거의 정점에 이르러 구멍가게 하나를 마주치게 되는데 이름이 ‘기대수퍼’다. 주인 어르신은 ‘없는 사람끼리 기대어 살자’는 뜻으로 가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예부터 가난한 사람끼리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살아서 그렇다고. 지금은 그마저도 거의 떠나고 없다. 옛 골목을 그리워하는 여행자나 사진작가들의 발걸음만 드문드문 이어질 뿐이다. 없이 살아도 서로 기대어 살자던 마을이었는데, 기댈 누군가조차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 수퍼도 곧 없어질 거야, 주인 어르신은 말했다.
스무 달만 존재했다가 비존재가 되는 시한부 서재를 차린 뒤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허둥지둥 댐, 어찌할지 모름 같은 장황한 수식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춘천에 살기 전부터 여행 삼아 자주 찾던 망대골목도 언젠가부터는 이런 소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것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죽음, 없어지는 동네, 멸종해가는 야생동물, 잊힌 유언이나 유산 같은 것들이 예전보다 눈꺼풀에 더 무겁게 덮인다. 첫서재 문 닫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진다. 심지어는 종종 꿈까지 꾼다. 소중하게 여겼던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깊은 슬픔에 잠기거나 허탈해하다가 부랴부랴 깨어난다. 깨고 나서 엉킨 기분이 풀리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언젠가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연한 이치다, 자연의 섭리다, 라는 위안은 너무 크고 웅장해서 더 초라하게 나를 내몬다. 거대한 해일이 덮쳐오는 걸 멀리서 미리 지켜보는 들풀이 된 심정이다.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마르지 않는 습한 까닭들로 마음에 이끼만 잔뜩 끼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선배 S가 예고도 없이 첫서재에 찾아왔다.
"혹시 버리는 종이상자 있어?"
오자마자 대뜸 묻더니 재활용 바구니에서 종이상자 한 면을 쭉쭉 뜯어가지고는 독립서재로 들어갔다. 멀리서 힐끔힐끔 바라본 선배의 뒷모습은 내내 분주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열고 나온 그의 손에는 갓 완성한 작품 한 점이 들려 있었다. 첫서재의 풍경 사진을 조각내어 인쇄한 뒤 종이상자 위에 모자이크처럼 붙여 만든 작품이었다.
"와… 이런 건 처음 봐요." "영수증 용지에 사진도 인쇄할 수 있더라고. 영수증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 휘발하잖아. 이 작품도 같은 잉크를 썼으니까 점점 희미해지다가 결국 종이만 남고 다 사라질 거야. 시한부 작품인 셈이지."
아마 첫서재 문 닫을 때쯤에는 거의 없어지지 않을까, 둘 다 사라질 운명인 거지, S는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 이런 류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불현듯 이곳이 떠올랐다며.
S가 떠난 뒤, 카운터 한쪽 벽에 그가 선물하고 간 마법 같은 작품을 걸어두었다. 매일 글을 읽거나 쓸 때 쳐다보며 앉아 있는 벽 쪽이었다. 매일 조금씩 휘발해서 사라지는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무언의 용기가, 작품을 건네주고 떠난 그의 손등을 보며 불현듯 일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는 무슨 까닭인지 소멸이나 상실에 관한 꿈을 더는 꾸지 않았다. 망대골목을 지나칠 때에도 알듯 모를듯한 무기력에 휩싸이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선배는 우리 주변에 사라지는 것들을, 잉크가 사라지는 인쇄용지에 사진으로 담아서 어느 공간에 전시를 해보고도 싶다고 했다. 나 역시 비슷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망대골목을, 또 이 작품의 존재를 짤막하게나마 글로 남겨두기 위해. 이 글은 오래도록 남겠지만 언젠가부터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만 비존재가 되는 무수한 원소들처럼 말이다. 상관없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