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Jul 17. 2022

외면과 직면 사이


 술 한 잔 할래?

 언제든.


 으레 하는 인사말을 진심으로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춘천에 온 뒤로 누군가에게 술자리를 하자고, 그래서 고민을 좀 털어놓고 싶다고 호소한 적이.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얼마 안 가 나는 그 말이 무용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술 한 잔 하며 서로의 삶의 행로를 진심으로 보듬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미 나의 세계는 그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는 탓이다. 사는 곳도 관심사도 취향도 일상도 그 무엇도. 그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고 사회라는 화분 안에서 더 뿌리내리고 생장해나가는 일에 몰입해 있었다. 서울 살던 때 내 주변 대다수가 그랬듯이. 달리기 경주하듯 숨 가쁜 일상을 살아내는 누군가에게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데 생각이 어디쯤에서 정체되어 고민이야, 라고 한가한 소릴 내뱉고 있는 게 우스워 보였다. 물론 그는 성심성의껏 들어주겠지만 해답을 내려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된 도리로 애써 들어주려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도 내겐 고역이자 빚일 터이다. 그냥 술 한 잔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다시 진심으로 즐거워지려면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얼른 복귀하는 길밖에 없다. 발맞추며 살아가는 기쁨은 그런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는다.


 첫서재 문 닫는 날이 체감할 만큼 다가오면서 매일 우울과 불안에 시달린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으면 작은 구슬을 삼킨 기분이 든다. 겨우 잠이 들면 못된 꿈이 몸의 회복을 방해한다. 첫서재에서 머무는 시간은 더 괴롭다. 지문이 겹겹이 묻은 책과 나무 천장과 매일 청소하던 유리창과 누군가의 손글씨까지. 평온을 안겨주던 모든 원소들이 이제는 일상의 평온을 깨뜨린다. 벌여놓을 땐 신났지, 이제 어디 수습해봐, 라고 비웃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읽고 쓰며 살아보겠다고 차린 공간에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날이 한참 길어지고 있다. 멀리서 누가 찾아와도 반갑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도 별반 궁금하지 않다. 과습한 날씨 탓도 해보지만 소용없다는 걸 안다. 몸에 창문이 달려 있다면 환기라도 할 텐데.


 계획한 대로라면 석 달 보름 뒤에 서재 문을 닫는다. 한 달이 더 지나면 서울과 직장으로 복직한다. 어떤 삶의 모양이 내게 어울리는지 이제 갓 알 것도 같은데 원래 살던 모양새로 일상을 복원해야 한다. 감수성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게 당연하다. 뭐 그렇다면 까짓거 과감하게 직장 때려치우면 되잖아, 서울 돌아가지 말고 춘천에서 살면 되잖아, 라고 스스로 다독이기에는 용기가 부족하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보려 해도 현실의 제약이 둑처럼 쌓여 있다. 먹고 살 방법도 마땅찮고 아이 교육 문제도 신중해야 한다. 사회생활에 관한 욕심을 다 비운 것도 아니다. 만약 훗날 이 삶이 지루해지거나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고향 서울로 돌아갈 밑천도 바닥난 뒤일 것이다. 하나하나 나열하기 버거운 두려움 투성이다. 그 와중에 이렇게 살다 보니 하고 싶은 것들은 눈치 없이 또 잔뜩 늘었다. 마음은 더 난장판이 됐다. 애초에 내 그릇의 크기를 파악하고 정리가능한 용량만큼 무언가를 안에 들였더라면, 하는 후회가 매일 밀려왔다 쓸려간다.


 처음 첫서재를 열기로 하고 춘천에 왔을 때는 나의 선택에 꽤 취해 있었다. 뭔가 남다른 삶을 혼자만의 방식대로 찾아나가는 탐험가가 된 양 신이 났다. 주변에서도 부럽다, 어떻게 용기를 냈니, 나는 그렇게 못할 텐데 멋지다는 말로 나를 한껏 부추겨주었다. 그렇게 붕 뜬 마음은 이곳에서 지내면서 좀처럼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완전한 행복의 섬을 발견한 기분. 보탤 것 없는 나날이었다.


 이제는 행복이라는 명분으로 외면해오던 것들을 직면할 시간이다. 날아오른 듯한 일상은 상상 비행이었다고, 탐험은 도피에 두른 포장지였다고 에둘러라도 인정해야겠다. 언젠가 지금에 이르게 될 줄은 알았지만 애써 쳐다보지 않고 결정을 미뤄뒀다. 그 뒷감당은 지금의 몫이다. 경우의 수를 A부터 Z까지 다 설계하며 사는 나에게도 이 감정의 파고만큼은 계획 바깥의 일이다.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삶의 파동은 고요했겠지만 후폭풍에 이렇게까지 잠식되는 일은 없었겠지. 첫서재에서의 시간들이 머지않은 훗날의 나를 조롱할 것만 같아 두렵다. 또 목젖 아래가 잠긴다.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 알 것 같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보편의 보폭에 맞추어 꼬박꼬박 걸었던 시절에는 적어도 이런 괴로움에 갇힌 적은 없었는데. 삶은 거기에 놓여 있는데 나만 환상 속을 헤엄치다 나온 것 같아 머쓱하다. 내게 부럽다 멋지다 말해줬지만 막상 본인의 삶은 보편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거나 본능으로 직감하고 있던 게 아닐까. 문득 그 말에 섞인 진심의 농도조차 가늠하지 않고 마냥 들뜨기만 했던 시간들이 우스워진다. 그 묽디 묽은 칭찬에 취했던 밤들이.


 아마 이 글은 얼마 안 가 몹시 부끄러워하게 될 것 같다. 그래도 내어놓는 까닭이라면 한 줄기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탓이다. 삶이 뭔지 한 줄로 정리해줄 누군가에게 이 글이 우연히 가 닿는다면 좋겠다. 그가 단 하루만 곁에 다가왔다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술 한 잔 할래, 하고. 그래준다면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다 끄집어내 버리고 그의 말을 좇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