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엄마의 오래된 길

by 김영연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어디에서 살아왔는지조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반백 년 넘게 몸담아 온 울산은 기억의 바깥으로 밀려났고,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집에서도 엄마는 마치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처럼 미안해했다.

“내가 너희 집에 너무 오래 있었지. 이제 가야지. 사위 눈치도 보이고…” “엄마, 어디로 가시려고요?”그러면 엄마는 어김없이 같은 대답을 꺼냈다.

“외가, 감천 가야지. 아버지 밥해 드려야 해” 50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를 향한 그 확신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엄마,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외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엄마는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거짓말하는지 확인해 봐. 전화해 봐.”

나는 큰외삼촌께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바꿔드리려 했다.

“엄마, 외가에는 이제 큰외삼촌 하고 외숙모만 계세요. 삼촌 바꿔 드릴 테니까 여쭤보세요.” 그러자 엄마는 전화를 넘기기도 전에 버럭 화를 냈다.

“삼촌 하고 너하고 똑같다! 왜들 그래!” 자신의 확신이 흔들릴까 두려워, 미리 화부터 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전화를 받은 외삼촌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왜 그러시노. 큰일 났다. 엄마 돌보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그 온화한 숨결 속에서, 나는 엄마의 현실이 또 한 겹 무너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엄마는 여전히 여기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 밥을 지어 드리고 왔다고 했다. 또 상균이 엄마—울산에 사는 조카며느리—에게 아버지를 잘 부탁해 두었다고도 했다.

“엄마, 상균이 엄마는 울산에 있어요. 그리고 엄마 아버지를 왜 상균이 엄마에게 부탁해요?” 그러나 엄마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세계에서 엄마는 아직 ‘딸’이었고, 아버지에게 밥을 챙겨드려야 한다는 오래된 책임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낮잠을 자는 척 누워 있는 사이 일본인 손님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2만 원만 빌려주세요. 내일이 정월 초하루인데, 아버지께 드려야 해요.” 손님은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고 멀뚱히 서 있었고, 엄마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간절하게 말했다.

‘2만 원만… 2만 원만…’ 나는 몰래 고개를 젓고 신호를 보냈고, 손님은 눈치를 채고 일본어로 “돈이 없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 말조차 믿기 어려운 듯 애원하듯 반복했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아버지에게 갈 채비를 다 해두신 듯, 보따리도 미리 챙겨 두셨다.

며칠 뒤, 엄마는 다시 일본 손님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사람은 정말 달라. 한국 사람이었으면 돈을 꾸어줬을 텐데… 일본 사람이라 역시 피는 다르더라.” 다른 일은 금방 다 잊어버리면서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 손님은 돈을 꾸어주지 못 한 사정을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엄마의 이야기에 우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다음에 또 오면… 2만 원을 꼭 꾸어 줄게요.” 손님은 웃으며 약속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엄마와 비슷한 증세의 숙모님 이야기를 전해왔다.

“어머님과 우리 숙모님이 가까이 계셨으면 친구가 되셨을 텐데요…” 그 말은 아마도, 엄마와 숙모님이 서로의 오래된 세계를 이해하고 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위로였을 것이다.

엄마와 외할아버지는 참 가까웠다.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어 대장간 일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딸들 중 말을 가장 잘 듣던 엄마를 장날마다 데리고 다니곤 했다. 그 일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엄마는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했었다. 할아버지 또한 엄마를 살뜰히 챙기셨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힘들지 않게 삼촌들을 시켜 나무나 쌀을 보내주기도 했다. 결혼할 때는 삼단거울이 달린 장롱을 외할아버지가 결혼 선물했는데, 어린 시절 나는 그 반짝이는 유리의 고요한 빛에 넋을 잃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도 마음씨가 참 어진 분이셨다. 장날이면 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국을 한 솥을 끓여,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먹고 갈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한다. 또, 동네 아이들이 코를 흘리며 다니면, 일일이 닦아주셨다고 했다. 작은 손길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던, 그런 마음이 늘 사람들에게 전해졌던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형제들에게도 소 한 마리씩 사 주셨다고 했다. 할아버지 형제들은 제일 맏형 김일용 할아버지부터, 막내 칠룡까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대장장이 일을 하며 번 돈으로 형제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려고 하셨다. 외가에도 소가 세 마리나 있었는데, 전쟁 때 피난을 가면서는 소 고삐를 놓아야 했다.

“너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구나. 네 갈 곳을 가거라.” 할아버지는 소들을 풀어주며 그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그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마음 아팠을지, 어린 엄마의 마음에도 오래도록 남았다고 했다.

우리 오빠가 아들로는 첫 손주였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학비까지 할아버지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60 순 잔치를 마친 어느 날, 할아버지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갑작스러운 이별은 온 가족에게 큰 슬픔으로 남았다.


엄마의 형제들은 지금도 말한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 그게 참 아까워. 효도도 못 하고…” 그래서일까. 엄마에게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리움과 기억이 만든 또 하나의 시간 속에서,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였다.

“엄마, 할아버지 보시려면… 천국 가시면 되잖아요.” 그 말에 엄마는 버럭 언짢아했다.

“나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네!”

“아니, 엄마가 그렇게 아버지 보고 싶다니까 그러죠.” 이럴 때의 엄마는 이상하리만큼 눈치가 빨랐다. 삶의 기억만 골라 붙잡으며, 살아 있는 것들만 끌어안으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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