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과 《바다의 기별》에서 글 변화를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바다의 기별》 같은 투가 더 좋다.
“칠장사 기행”은 기행문을 어떻게 전개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적어도 나에게는) 모범을 보여준다. 칠장사는 임꺽정의 절이다. 적어도 벽초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알고 있다. 칠장사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임꺽정과 칠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임꺽정과 해소국사를 느낀다.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벽초에 대한 공경(?)을 빼놓지 않는다. “벽초는 이 먼 곳의 골짜기와 마을들과 길과 지리를 어찌 다 알아서 소설 안에 들여 앉힌 것인가...”
‘에세이’다. 에세이는 우리말로 수필이다. 검색하면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붓가는 대로 견문이나 체험, 또는 의견이나 감상을 적은 글”이다. 견문, 체험, 의견, 감상 등이 나열되어 있다. 수필에 대하여 좀 더 본다면 다음과 같다.
흔히 수필을 essay의 역어로 생각하나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써왔다. 중국 남송(南宋) 때 홍매(洪邁)의 《용재수필(容齋隨筆)》(74권 5집)의 서문에 "나는 버릇이 게을러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써 두었으므로 수필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보이고, 한국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의 연경(燕京)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일신수필(日新隨筆)〉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박경리 선생에 대한 기억을 적은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를 보면서 그의 됨됨이를 엿본다. (연장자의 됨됨이를 논하는 것의 외람됨은 용서를 구한다.) 김지하가 풀려나는 영등포교도소에 나온 박경리 선생에 대한 회상이다. 지하와 백기완 선생, 박경리 선생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전달하지 않는 김훈, 그날 그 추운 그날, 일어난 일이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 김훈의 아내가 울면서 말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는 이 말이 추웠던 그날, 그 시절을 대변한다. 그렇게 느껴진다. 박경리 선생이 추위에 떠는 동동걸음이 떠 올라 안쓰러움을 더 할 길 없다.
“회상”은 《칼의 노래》에 대한 회상이다. “꽃은 피었다”, “꽃이 피었다”.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했다. 다시 읽어보니 중요하다. 아주 많이. 설명하라고 하면 당최...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우면서 고민 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말과 사물”에서 언급한 한국어 문제는 고민 중인 복거일의 ’ 영어공용론‘와 같이 봐야겠다. 모국어를 폄하하거나 영어를 숭배하거나 하지 않는다. 단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자 함이다. (단순히) 말과 사물을 설명하기 위한 것을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이 써지지 않는 새벽에 나는 때때로 장대높이뛰기 선수를 생각했다. 그는 솟구치기 위하여, 오직 지상의 단 한 점 위에 장대를 박는다. 그는 그 점 위에 선다. 그는 솟구치기 위하여 장대를 버린다. 지상의 그 한 점과 장대마저 버린 후 그는 이름답고 외롭게 솟구쳐 오른다. 보아라, 저 치솟는 도약의 자유를 보아라. 사바의 예토 위에 썩는 검불처럼 내팽개치는 저 장대의 최후를. 《문학기행》 서문
그의 글을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좀 더 알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의 치열함을 배우고 익히고 싶다. 한 점에 기대어 높이 솟구치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오래전 쓴 글을 다시 읽고 수정했다. 글이 중언부언, 형용사가 많다.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느낀 것을 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 그래야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다는 허영. 지금도 만족스럽지 못한 글이다. 수정은 (퇴고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말할 수 없다) 잘못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꼭 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아마도 헤밍웨이)
덧_
생각의 나무, 2008년 11월 - 초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