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쁘띠선비 Dec 12. 2020

20대를 보내며

2010년 11월 수능을 본 다음 날. 날씨는 추웠지만, 같은 반 친구들과 학교 풋살장에서 공을 찬 기억이 있다. 점수 내기를 하며 열심히 찼다기보다, 10대를 가로지른 거대한 시험이 끝난 뒤 생겨난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서 공을 차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들 얼굴을 보며 나는 '우리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마 19살의 끝에서 수능이라는 큰 시험을 치러냈고, 이제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20대를 눈앞에 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뒤 20대가 된 나는 내가 '어른'이 아님을 금세 자각했고, 입시로 미뤄놓은 자아성찰과 사춘기를 이제 겪어야 하며, 대입이 아닌 삶의 목표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랐음을 알게 되었다.


20대의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다. '대입'과 같은 명확한 목표가 부재한 시기였고, '취업'이라는 그다음 목표의 양상이 무척 다양했고 20대 초반에는 먼 이야기였기 때문에 일단 손에 잡히는 다양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을 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동아리, 교내 프로그램, 학과 내 활동에 참여하고, 여행도 가고, 교외 프로그램에도 많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그 시절 주위 친구들이 많이 하는 활동을 함께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하고 싶은 활동을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경험을 하는 것은 좋았지만, 경험을 다양하고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일을 많이 벌려 지칠 때도 있었다.


그 수많은 경험 중에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경험은 '인도 여행'과 '아산서원'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험 여부의 결정을 오롯이 나 혼자 내렸다는 것이고, 둘 모두 취업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 두 경험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다.


21살 때 떠난 인도 여행은 준비과정부터 나를 두렵게 했다. 하지만 두려웠기 때문에 가야 했던 경험이었다. 인도를 딱히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는 고3 때 선생님의 1년 전 제자들이 대학 합격 후 함께 여행을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친한 고3 친구들도 우리도 가자고 이야기한 것이 다였다. 하지만 21살 내 상황에서 인도는 왠지 '대입' 이후에 스스로 할 일과 목표를 정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깨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곳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단지 그 이유를 하나 들고 인도로 떠났다. 여행을 하며 인도의 다양한 지역을 방문하고 엄청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이질적인 환경과 문화를 가진 곳에서 한 달을 보낸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날씨가 덥고 할 수 있었던 활동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많은 성찰을 했던 시기였다. 숙소 예약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30일의 일상을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 지 결정해야 했다. 그곳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앞으로의 삶을 내 생각대로 펼쳐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에 차있었다.(물론, 여전히 주체적인 삶에 완전히 가닿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게 인도 여행은 그것으로 가는 확실한 첫 발돋움이었다)

<바라나시 가트 어딘가에서 매일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인도 여행 후 나는 군입대를 했고, 군대에서 독서에 심취했다. 처음에는 소설을 열심히 보다가, 어느 순간 인문학 서적을 보기 시작했고, 이 관심은 '아산서원'이라는 프로그램을 찾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산서원'.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재양성 프로그램이라는 취지로 5개월의 국내 인문학 교육과 5개월의 해외 인턴십을 기회를 무료로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무조건 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산서원의 조건에 5학기 재학이라는 조건이 있었기에 나는 복학 후 5학기까지 마치고 아산서원에 지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2년 뒤 실제로 아산서원에 지원했고, 아산서원에 합격하여 10개월의 과정을 수료했다. 아산서원의 프로그램이 기대한 것에 100% 부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다양한 학문의 기초를 맛보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으며, 미국이라는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줬다. 학문을 접하는 태도를, 사람과 생각을 대하는 태도를 갖추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산서원 사이트: https://asanacademy.org/kor/main/)

이외에도 많은 공식/비공식, 공적/사적 경험을 했고 그 결과 내 취향과 신념, 판단과 결정의 기준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을 구체화하여 문장으로 정리하게 된 데에는 책의 영향이 컸지만, 그러한 단계에 이르고 그 생각들이 삶에 뿌리가 내리게 된 것은 그 당시 경험했던 것들에 영향이 컸다.


20대까지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바를 공유하면, 삶의 목적은 행복이고 나는 행복을 마음의 평안함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 감정의 양극단보다는 평온함이 행복한 상태라는 것이다.


삶과 관련해서는 내 삶은 생존과 학습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생존은 생업을 꾸려가는 것, 학습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내게 생존의 문제가 해결됐을 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는 답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결하는 재미없는 것이었는데, 지금 하는 공부는 그 끝이 보이지 않으며 평가를 받지 않고 단지 스스로 세계관을 넓히고 자신을 수양하는 데 의미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삶의 모습은 일에서는 기획자, 일상에서는 교양인이다. 기획자라는 일의 목표를 잡도록 영향을 준 것은 임팩트 베이스캠프였다.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일을 하는 사람, 주어진 자원 하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기획자다.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하며 더 나은 스스로를 닦는 사람. 그것을 예전에는 '선비'라는 명칭으로 불렀고 선망했다. 지금은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을 읽고 교양인이라는 단어로 그를 대치하고 있다. 한 개인과 시민으로서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드는 것에 적극적 실천을 하는 사람이 교양인이다.


일할 때 세운 기준은 '장인정신'이다. 일이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데 분명 목적이 있지만, 일이 내 손을 거쳐갔을 때 완결성 있게 일을 하고 싶다. 그 자체가 내게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떠나서 그 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장인정신'이라고 부르며, 제현주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10년 간 한 직간접의 경험, 내 주위를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 덕분에 나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앞으로 또 변하겠지만, 29살의 나는 19살의 나보다 더 만족스럽다. 아직 '어른'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다른 것은 몰랐던 19살의 나보다는 낫다. 지금은 취향이 생겼고,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이 있으며, 여전히 망설이지만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만났고, 행복에 대해 스스로 정의도 내려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것만큼 실천하는 것은 아니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내가 받아들인 가치와 신념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30대가 기대가 된다. 20대 동안 쌓아놓은 이 기초체력을 발판 삼아 좀 더 평온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며, 기획자/교양인이라는 모습을 더욱 갖춰가며, 장인정신으로 처리해낸 일과 그 성과를 마주하기를 기대해본다.


아래 책은 20대의 내 삶을 채워준 좋은 책들이다. 내 생각에 좋은 책은 아주 미세한 부분이라도 내 삶을 기존과 달리 변화시킨 책이다. 이 책들은 내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켰고, 다른 식으로 행동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좋은 책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만든 책

[일상]

페터 비에리  - 교양수업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노자  - 도덕경

정약용  - 목민심서

신경숙  - 엄마를 부탁해

류시화  -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알랭 드 보통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유시민 -  어떻게 살 것인가

코이케 류노스케 - 생각 버리기 연습

김수영  -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

앨리스 먼로  - 디어 라이프

한병철 -  피로사회

[일]

마스다 무네아키 -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

마쓰이 타다미쓰 - 기본으로 이기다, 무인양품

제현주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유시민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매거진의 이전글 [가사 추천] 로이킴의 어른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