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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Jan 29. 2020

29년 전 교통사고의 수수께끼가 풀리다

기억은 왜곡되고 인생은 알 수 없다

그날 오후 난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 친구 K와 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학원에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그 7차선 도로엔 횡단보도 표시만 있고 신호등이 없었다. 아산에서 대전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 이렇게 큰길을 건너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예전 살던 곳엔 차가 이렇게 많지도 않았고 내 생활 반경에 4차선 이상인 도로도 없었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시골학교 앞 2차선 도로도 무서워서(신호등이 없던) 계속 건널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던 날 어떤 어른이 함께 건너 줘야 했던 쫄보였는데, 대전에 와서 이렇게 차가 쌩쌩 달리는 7차선 도로를 건너야 하는 건 정말이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대전으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은 모두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아빠는 새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6학년인 언니도 학교에서, 갓난쟁이 동생을 돌보는 엄마도 집에서 다들 바빴다. 도시의 생존방법은 자연스레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이곳의 초등학교 2학년 생은 시골의 3~4학년 언니들처럼 어른스러웠다. 그 7차 도로를 건너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부모님이 아닌 친구 K였다. 바로 얼마 전 M은 내 손을 잡고 같이 건너며 설명해 줬다.


"일단 반만 건너서 이 가운데 노란 선까지만 와. 여기서 기다리다가 차가 안 오면 나머지 반을 건너면 돼. 쉽지?"


중앙선을 중심으로 반씩 건너는 전략이었다. 그런 꿀팁이 있었다니. 그날 이후 길을 건너는 데 꽤 자신이 생겼고 하루에 두 번씩 잘 건너게 됐다.



사고의 기억

아직 2학년 1학기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 금요일 오후, 반 친구 M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학원 갈 시간이 되어 K와 함께 길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그 7차선 도로를 건너야 했고, 그날은 든든한 K와 함께였는데도 교통사고가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는 멀쩡하고 나 혼자 사고를 당했다. 그날 우린 손을 붙잡고 길을 건넜고, 평소처럼 중앙선에서 기다리던 중 내가 달려오던 가스 트럭에 치였다. 목격자에 의하면 난 차에 부딪혀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져 트럭 아래 깔렸다고 했다.


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바로 K의 아버지였다.


우리가 건너던 그 7차선 도로의 이쪽 편(건너편이 아닌)에는 K 아버지의 가게가 있었다. 그날 가게 앞에 서서 마침 우리가 길을 건너는 걸 보고 계셨는데, 갑자기 트럭이 달려와 나를 치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달려오셔서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며 그 트럭 운전사 뺨을 때리셨다고 했다.

사고 순간 현장을 지나가던 퇴근길 만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내 사고를 목격하고 놀라서 "어머머 어떡해!" , "뉘 집 딸인지 안됐다.", "어린앤데 어떡해.. 쟤는 분명 죽었겠다"라며 웅성거렸다.

그 버스 안에는 우리 아빠와 동료 선생님들도 있었다.

아빠는 교통사고가 난 반대 측에 서 있어서 사고를 보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놀라 소리 지르고 수군대는 걸 듣고 사고의 심각성을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버스를 타고 아빠는 친구와 저녁 약속에 갔다.

생존 본능 같은 거였을까? 사고 당시 정신을 잃지 않았다.


부딪히던 순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정신을 잃지 않았던 걸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소리 내 울었기 때문이다. 트럭 운전자가 날 들어 올려 조수석에 태운 것, 옆에서 울고 있던 K에게 그가 "얘네 집 전화번호 뭐야" 했을 때 내가 우리 집 전화번호를 댄 것도 기억한다. 내 웅얼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아저씨가 재차 번호를 물어봤을 때, 난 다시 한번 확실하게 번호를 댔다.


날 조수석에 눕히고 차 문을 닫았을 때쯤(아마도) K의 아버지가 등장하셨으리라. 다행히 1~2분 거리에 큰 병원이 있어서 그쪽으로 이동했고, 그 사이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깨어났을 땐 밖이 캄캄해서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으니 토요일이라고 했다. 금요일 오후에 사고 나서 토요일 밤에 깨어난 것이다.


그날의 사고를 이토록 상세하게 기억함에도 딱 한 가지 풀지 못한 의문이 있었다. 바로 사고 당시의 정확한 상황과 원인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사고 직전 친구가 "안돼"하며 내 팔을 잡고, 나는 그걸 물리치고 억지로 뛰어가서 사고가 난 것까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왜, 도대체 왜 그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차에 치였던 걸까? 이 질문은 30년 가까이 수시로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다 사라졌다.



당시 같은 동네에 사시던 아버지 고향 지인의 어머님이 기묘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셨지만 내가 봐도 정신이 또렷하고 정정하셨는데, 원래는 시골에 사시는 분인데 출가한 손주분이 최근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와서 잠깐 올라와 밥을 해주며 지내고 계셨었다. 어느  집에서 손자를 기다리며 저녁 준비를 하시다 신발도 신지 않고 대문을 열고 나가 족히 300미터도 넘는 거리의 큰길로 걸어가셔서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바로  사고가 났던  도로,  사고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고였다.

구글 맵에서 찾은 그날의 사고 장소. 이제는 신호등이 있다.

그때 어른들끼리 말씀하시길 노인네가 갈 때가 되니 집에 있다가도 그렇게 홀연히 가는 거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사고였다. 어른들은 "요리를 하시다 갑자기 재료가 부족해서 시장에 뭘 사러가다 사고가 났나?" 하다가도 "웬만한 건 동네 슈퍼에도 다 파는데 굳이 왜 거기까지 갔겠냐"며 갈 때가 되니 뭐에 홀린 듯 급하게 떠나신 거라고들 했다.


"사고가 날 운명이면 어떻게든 난다"라는 게 어른들의 중론이었는데, 8살이었던 나는 그 말을 얼핏 들었지만 인상에 깊게 남았었다.


어떻게든 설득력 있는 이유가 필요했던 난, 내 사고도 그런 식으로 결론을 냈다. 사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서, 그날 나한테 뭐가 씌어서 사고가 난 거라고. 친구가 붙잡는데 굳이 튀어나가 사고 난 게 팩트인데, 겁도 많은 나의 판단력으론 불가능한 선택이니 그저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서, 잠깐 뭐가 씌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게 그나마 타당했다.


30년 가까이 그렇게 믿고 살았다. 몇 달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주말 오후 날씨가 좋아 남편과 산책을 나섰다.


우리 집 인근엔 정말이지 뉴욕시 예산 낭비 같을 정도로 신호등이 많다. 주택가라 차도 많이 없는데 신호등은 너무 많아서 대부분 사람들은 무시하고 다닌다. 그중 한 군데, 신호등이 있을 법한데 아직 설치되지 않은 짧은 2차선 도로가 하나 있다.


집을 나오면 꼭 건너야 하는 길인데 평소엔 한적한 도로지만 출퇴근 시간엔 잠깐씩 기다렸다 건너야 할 만큼 제법 다닌다.


그날도 남편과 그 길을 건너다 중앙선에 서서 차를 두어 대 보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오는데 거리가 꽤 멀어 보여서 발걸음을 뗀 순간 남편이 내 팔을 세게 잡았다.


같이 건널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다른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내 손을 뿌리치고 대 여섯 걸음 정도 되는 길을 먼저 건넜다. 금세 내 뒤로 차가 스쳐 지나가는데, 하마터면 위험할 수도 있었단 느낌이 들어 아찔했다. 나는 이미 가려고 마음을 먹어 시간 계산이 다 된 상황인데 갑자기 남편이 잡는 바람에 타이밍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내 몸은 원래 움직이려고 했던 방향으로 더 빠르게 나아갔다.


"내가 충분히 다 보고 가려고 한 건데 갑자기 붙잡아서 더 위험할 뻔했잖아."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걷는데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잠깐, 방금 이거 뭐지?'


2학년 때 났던 교통사고 직전의 상황이 방금 재현되었음을 깨달았다.

사고가 난 그날도 난 중앙선에서 친구와 서서 멀리서 오는 차를 살피고 있었다. 멀리서 트럭이 오는 게 보였지만 충분한 거리가 있었다. 나는 얼른 건너고 싶었다. 중앙선에 서 있는 내 뒤로 씽씽 달리는 차들이 무섭고 신경 쓰였다. 거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래서 거리 계산을 하고 건너려고 한 순간 친구가 날 잡았고, 그 지체된 시간을 생각 못하고 몸이 먼저 달려 나가다가 그 사이 가까워진 차에 치인 것이다. 영원히 미제로 남을 줄 알았던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 실마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풀렸다.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평생을 은인으로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보니 사고의 원인 중 하나였다. 남편도 그렇고 그날의 친구도 그렇고, 날 멈출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아예 잡지 말고 그냥 가게 두는 게 더 안전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들도 본능적으로 잡은 거였을 테니 어쩔 순 없지만.


그녀가 잡지 않았다면 아마도 무사히 건넜을 것이고 그날 사고도 없었을 거다.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다 받은 전화는 엄마 예상대로 아빠가 저녁 먹고 온다는 전화였을 거다. 엄마가 부랴부랴 업었던 막냇동생을 피아노 학원 다녀온 언니에게 맡기고 뛰어나갈 일도 없었을 거다. 좀 이따 아빠가 식당에서 저녁 먹고 간다고 전화했을 때 언니가 받아서 "정아 사고 나서 엄마 병원 갔어."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빠가 식당에서 칼국수를 시켜놓은 채 그대로 병원으로 달려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까 버스에서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던, 그 무서운 교통사고를 당한 게 나였다니 아빠는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을까. 아까 버스에서 사람들이 다들 죽었을 거라고 했던 아이가 당신 딸이었다니. 현실만큼 극적인 드라마가 있을까.


사고의 원인을 깨달은 후 친구에게 악감정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다. 내 안전을 나보다 더 걱정하는 내 남편이 그런 것처럼, 그녀도 순간 날 위해 본능적으로 붙잡았을 테니까. 그저 나와 친구의 순간적 선택이 어긋나 사고가 난 것이다. 어쨌든 오랫동안 찜찜하던 질문에 답을 찾아 마음 한편이 후련해졌다.


사고를 본 사람들이 다들 죽었을 거라고 한 것과 달리 나는 가벼운 타박상과 이마에 상처 정도만 입었을 뿐 부러진 데 하나 없이 살아났다. 문병 오는 부모님 지인들마다 하신 말씀은 크게 두 종류로, "하늘이(또는 조상이) 도왔다"는 것과 "어른이 그 사고를 당했으면 죽었거나 불구가 되었을 것"이란 얘기였다(참 어른들은 예나 지금이나 표현이 과격하심). 종합병원에서 받은 뇌 검사도 이상이 없다고 나왔고, 길게 넘게 입원하긴 했지만 무사히 퇴원했다.


내 인생 첫 번째 죽을 고비였다.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친구와 돈가스 먹으러 갔다가 치즈가 목에 걸려 죽을 뻔 한 경험을 글로도 쓴 적이 있다.


그날의 몇 초는 두 달 넘게 입원했던 8살 때의 교통사고보다 훨씬 더 죽음에 가까이 다녀온 순간이었다. 내가 결국 여기서 이렇게 죽으려고 평생을 살았나 싶어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른다. 삼 남매 중 유난히 많이 다쳐봤고, 교통사고도 두 번이나 났고, 20대부터 쭉 지내온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리 잡으려 아등바등 살았다. 2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 그것도 처음 가 본 은행동 돈가스 집에서 죽는구나 싶었던 순간, 그동안의 삶과 성공에 대한 노력과 집착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이 들수록, 죽을 고비라는 게 특별한 경우(14시간 넘는 비행이나 한 달짜리 크루즈 여행을 하다가)에 발생하는 게 아니란 걸 느낀다. 며칠 전 코비 브라이언트의 비보처럼 말이다. 그 또한 평소에 일상적으로 다니던 딸의 농구 경기장에, 자동차만큼 일상적으로 타던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 생긴 비극이었다.


죽을 뻔한 사고는 의외로 평소 내 생활 반경 안에서, 특별할 일이 없는 지루하고 평범한 날에 찾아온다. 몇 년째 다니는 학교나 회사 가는 길에, 평생을 살아온 집 앞에서, 내 손바닥처럼 훤한 동네의 익숙한 장소에 가다가 생긴다. 내가 평소처럼 학원에 가다가, 친구 만나 돈가스 먹다가 큰일이 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기 때문에 대부분의 죽음이 허망한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순간이 왔을 때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 전 눈 오는 토요일 오후, 이웃사촌에게 선물로 받은 핸드 블렌더로 주방에서 카스텔라를 만들며 노래를 불렀다. 주방에서 요리할 땐 언제나 음악을 틀어놓는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서 내 목소리가 음악소리보다 더 커진 것 같아 거실에서 TV를 보던 남편에게 문득 미안해졌다. 노래가 다 끝나고 그에게 새삼 물었다. "나 목소리 너무 커? 시끄러워?" 하니 괜찮단다. 내가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면 뭔가 한껏 즐거워 보여 자기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러게. 별 것도 없는 날인데 그래도 뭔가 즐거우니 노래가 나오는 거겠지?


당장 해결해야 할 큰 문제없이, 특별히 아픈 데 없이 무탈하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어려운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선물처럼 받는 마음의 여유일까. 유학시절 하루에 두세 시간도 못 자는 일도 많았어서 지금은 하루에 7시간 넘게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치즈가 목에 걸려 정신이 아찔해졌을 때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2020년을 맞이할 수 있어 감지덕지하다.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먼 미래보단 오늘에 충실하고 소소한 행복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다행이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별거 아닌 오늘 하루가 눈물 나게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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