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4월도 끝났고, 집콕은 계속된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코로나 뉴스를 보며 마음 졸이던 게 1월 중순, 벌써 3개월도 넘은 일이다. 몇 년 만에 놀러 왔던 언니가 돌아가고 뉴욕에 남은 나는 되도록 외출을 피하며 집안에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출했던 1월 말 친구 만나러 가는 길에 버스 뒷자리에 앉은 여자가 전화 통화로 코로나 이야기를 했던 걸 보면 그때쯤엔 미국에서도 어느 정도 코로나에 대한 얘기가 오가던 상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친구와도 한동안은 만날 수 없겠다고 했었다.
그 후 1월 마지막 주부터 2월 첫째 주까지 약한 감기로 일주일간 앓았다.
밤에 좀 춥게 자서 걸린 가벼운 감기가 나았을 즈음엔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고, 나는 더더욱 외출을 피했다.
2월 말.
사람들이 사재기를 심하게 하기 전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미니멀리스트라 뭐든 쟁여놓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라면도 박스로 사고 스팸도 세 개나 샀다. 냉동된 해물, 생선부터 채소까지 평소엔 사지 않는 것들까지 전투적으로 담아 계산을 하니 역대급 금액이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그다음 날엔 온라인 주문으로 쌀 한 포대와 컵라면도 한 박스 더 주문했다. 겨우 둘 뿐인 식구지만, 우리 집 주방 총책임자로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다양한 재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3월 둘째 주.
남편의 촬영이 모두 철수되어 출근 후 두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출근하러 나간 사람이 "우리 어제를 마지막으로 촬영 철수한대. 방금 결정 나서 촬영장에 아예 갈 필요가 없게 됐어." 하는데 마음이 놓였다. 이미 많은 회사들이 발 빠르게 재택근무를 시작했던 주여서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근처에 파파이스 매장이 있다고 해서 치킨이나 사 오라고 했다.
3월 13일 금요일의 파파이스 치킨. 우리가 마지막으로 사 먹은 외부 음식이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연일 뉴스에는 주지사와 대통령이 나와 브리핑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3월 29일, 흐리고 비가 와서 유난히 쌀쌀했던 일요일 저녁.
하얀 구급차가 소리도 없이 우리 아파트 입구에 섰다. 사이렌 한번 울리지 않고 조용히 세운 차에서 마스크를 쓴 구급대원 두 명이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미세한 자동차 소리에 우연히 창밖을 본 나는 설마 하며 숨죽이고 서 있었다. 그동안 우리 골목 어떤 집 앞에도 앰뷸런스가 선 걸 본 적이 없었는데, 하필 제일 처음 본 게 우리 건물이라니.
올 것이 왔구나.
건물에 들어온 구급대원들은 한참이 지나도 나가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엔 젊은 커플, 가족들이 대부분이지만, 수십 년 거주 중인 어르신들도 여러 가구 있는데 그중엔 혼자 사시는 분들도 계셔서 이런 시기엔 좀 염려가 되었다.
15분쯤 지났을까, 아래층에 사시는 한국 할머니가 휠체어에 태워진 채 구급대원들에 의해 실려 나오는 게 보였다. 6년 전 처음 이사 왔을 때 한국인인걸 보고 서로 신기해서 인사 몇 마디 한 후 전혀 왕래도 대화도 없던 한국 할머니.
하얀 천에 둘러 쌓인 채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는 한 눈에는 크게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정신도 있으신 것 같았고, 직접 움직이실 수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뉴욕 병원에 자리가 없어 상태가 어지간히 심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 저렇게 실려가시는 건 분명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었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계속 마음이 쓰이던 건, 할머니가 신발을 한 짝만 신고 한 짝은 들고 계셨다는 점이다. 아니 얼마나 상황이 급박했으면 신발 한 짝 신을 시간도 없이 휠체어에 타셔야 했을까. 평소 왕래 한번 없던 분이지만 그 신발 한 짝 들고 추운 날씨에 휠체어에 앉아 차에 태워지길 기다리시는 모습이, 지금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우실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날씨라도 맑았으면 좋았으련만, 종일 내린 비가 그친 땅은 축축했고 저녁 공기는 어둡고 차가웠다.
다행히 구급차에 태우기 직전 구급대원이 할머니 신발을 신겨드렸고, 차는 조용히 떠났다. 창밖으로 나처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을까? 유령도시 같은 거리엔 지나가는 차 한 대, 사람 한 명 없었다.
한 일주일은 그렇게 차 타고 떠나신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에 신발을 못 신은 채로 타고 가셨다면 더 오래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3월 15일 날 슈퍼에 다녀온 게 마지막 외출이었는데 벌써 4월 25일이다.
집순이 끝판왕인 내 인생에서도 칩거의 역사가 새로 쓰이고 있다. 그 사이 창 밖 벚꽃 나무에 꽃이 환하게 피었고, 겨우내 비쩍 말라있던 나무에는 여기저기 생생한 초록색 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몇 주 후면 나무들은 몰라볼 정도로 초록이 무성해질 것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는데도 나는 아직 집에만 있다.
2020년은 결국 이런 식으로 흐르다 끝나게 될까?
코로나가 없어져도 우리는 다시 예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말은 무슨 뜻일까? 비가 오면 오는 데로, 맑으면 맑은데로 창문으로만 바깥공기를 쐬며 바깥에 마스크 쓰고 걷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슈퍼 입구 앞에서 줄을 서서 들어가고 한 달 전엔 상상도 못 했던 마스크가 (미국에서) 생활화되었다는 게 제법 평범하게 느껴진다.
한두 달 전의 시각으로 지금을 보면 재난 영화 실사판 그 자체다.
우리의 달라진 일상, ”New normal"은 벌써 시작된 걸까? 15년 넘게 살며 마스크를 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뉴욕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인종, 나이 불문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앞으로도 쭉 이어질,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보통"인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도대체 언제쯤 여행도 하고 마음껏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게 될지, 올해는 그냥 이대로 있다 끝나는 건 아닐지. 맛있는 걸 먹어도 재밌는 걸 봐도 머릿속 한편은 계속 시끄럽다.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별 감흥 없이 보내던 두 달 전의 사소한 일상이 옛날 일처럼 빠르게 멀어진다. 지금은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귀중한 사치가 된 코로나 이전 우리의 일상. 사소하고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은 이제 보니 위대한 축복이었다.
12월에 시작한 유튜브에 몰두하며 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는 한편, '도대체 언제까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이 큰 나라가 미국이고, 그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뉴욕이다.
이대로 간다면 여름도, 가을까지도 계속될 수도 있는 지금의 상황. 먼 훗날 우리의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며, 2020년은 정말 어마어마한 한 해였다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며칠 전엔 집콕 40여 일 만에 처음으로 외출해 옆 동네에 한국 장을 보러 다녀왔다. 봄기운이 만연한 날씨, 오랜만에 쐬는 바깥공기라 설레었는데 마스크를 써야 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구급차 타고 가셨던 할머니가 남편 말로는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것 같다. 다시 평범한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와 집콕하며 얼른 이 모든 게 지나가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