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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술래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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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베 Nov 01. 2018

프롤로그-마시고 마시고 마시다 보니

술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잡스러운 기록

고등학생 때였다. 학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겨울방학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호프집을 하나 통으로 빌렸다. 20대 초반이 주축이던 한 동호회의 송년 모임을 위해서다. 스케이트 보드, 스노 보드,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서른 명 남짓 모였는데 고등학생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인 회원들을 위해 아예 호프집을 전세 낸 운영진이나, 빌려 준 가게 사장이나…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덕분에 좋은 경험은 했지만.


작정하고 모임에 참석했다. 술 아예 안 마셔본 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취해본 적은 없었다. 몰래도 아니고 부모님의 권유로 한두 잔이었으니 취해봤을 리 없다. 설렜다. 호기심이 넘치던 시절이다. 모든 게 새로웠다.


모임 시작 직전 호기롭게 부모님께 전화했다. 살짝 긴장하며 말끝을 흐렸다.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용기가 가상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충 운은 띄워놨으니 어떤 모임인지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응, 알았다. (여보, 여보, 얘 오늘 집에 안 들어온데)”


나무라는 말투가 아니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오히려 기특해하는 목소리였다. 두 분 대화가 수화기 너머로 또렷하게 들렸다. 어이없는 미소와 ‘이 놈도 이제 다 컸구나'하는 흐뭇한 표정이 눈 앞에 선했다. 잠시 당황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상투적 표현이 아니다. 공중전화였으니 실제 수화기를 내려놓는 행위를 말한 거다.)


처음으로 ‘취한 기분’이란 걸 느껴봤다. 머리가 빙빙 돌고 웃음이 자꾸 나왔다. 마구 소리 지르고 떠들어도 힘들지 않았다. 중간에 뛰쳐나와 근처 오락실에서 펌프를 했다. 춤을 춘 건지 게임을 한 건지 몸부림을 친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서로를 보고 깔깔거리기 바빴다. 빙판길에 넘어졌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생전 욕이라곤 하지 않던 친구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육두문자를 날렸다. 자기 가슴팍에 침까지 뱉었다. 누군가는 토하고 누군가는 한쪽 구석에서 아예 잠들어버렸다. 이 밤 일어난 모든 행위는 좋은 놀림감이 되었다. 한 동안 만날 때마다 서로 놀리느라 배를 잡고 굴렀다. 그야말로 난장판. 대부분이 자기 주량을 알리 없는 나이였다.


당연하게도 이 날 마신 술은 소주였다. 아마도 참이슬이었던 것 같은데 도수가 지금보다 몇 도는 높았을 거다. 23도로 기억한다. 지금은 참이슬 오리지널이 20.1도, 참이슬 후레쉬가 17.2도다. 세월은 알코올 도수마저 희석시켰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로 음주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소주, 맥주, 양주. 딱 세 가지 분류만 머릿속에 있었다. 이제는 수십수백 가지로도 분류 가능하다. 마시고 마시고 마시다 보니 할 이야기들이 쌓였다.


이 이야기는 술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잡스러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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