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무통 로칠드 2013
보르도는 생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사이사이 와이너리 건물들이 보였다. 오래된 성부터 최첨단 현대식 건물까지 수백 가지 모습이었다. 수백 년 된 곳도 여러 개였다. 대를 이어 와인을 생산하는 그 일관된 철학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신생 와이너리도 여럿이었다. 세 여성 친구들이 모여서 만든 와이너리, 은퇴한 교수가 아내와 둘이 운영하는 와이너리 등등 규모와 형태가 천차만별이었다. 역사와 전통, 변화와 시도, 재기 발랄함. 다양한 에너지가 넘쳤다.
2014년 여름이 오기 직전이다. 일주일 가량 보르도에 머물렀다. 적게는 하루에 두 군데, 많게는 일곱 군데씩 와이너리를 돌았다. 책으로, 영상으로 보던 와인 생산 전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원 없이 시음했고 원 없이 설명을 들었다. 오직 와인만을 위한 여행이었다.
보르도 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샤토 무통 로칠드 방문이다. 보르도 여행을 결정하고부터 안 사장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와인 스승이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그가 그렇게 마셔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그의 로망은 어느새 내 로망이 되었다.
샤토 무통 로칠드는 겉모습부터 압도적이었다. 포도밭 사이로 곧게 뻗은 길 양 옆에는 잘 가꾼 정원수가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다.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 정면은 신전을 연상케 한다. 규모도 보르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크다.
안내를 받아 와이너리 내부를 둘러봤다. 와이너리 특유의 음습한 기운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우선 와이너리 역사가 담긴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현장에서 설명과 함께 지켜봤다.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관광객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 일 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기분은 오묘하다. 연출된 모습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장은 범접할 수 없는 긴장감이 넘친다.
현장을 다 돌고 아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가장 기대하던 공간이다. 1924년부터 최신까지의 샤토 무통 로칠드 라벨 원화가 모두 전시 중인 곳이다. 장 카를뤼가 디자인한 최초 라벨부터 살바도르 달리, 후안 미로,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키스 해링, 프란시스 베이컨, 아니쉬 카푸어, 제프 쿤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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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작품은 실제 와인 라벨 사이즈와 동일하다. 인쇄 기술이 발전하기 전이라 일대일 사이즈로만 인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특정 시점 이후부터는 작품 사이즈가 제각각이다. 인쇄 기술 발달 이후에는 보다 과감하고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다. 작가들은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별 거 아닌 포인트일 수 있지만 작품 실물을 보면서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결국 마음에 드는 작품이 그려진 엽서도 여러 장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와인 시음 차례다. 꿈꾸던 그 순간. 샤토 무통 로칠드를 직접 마셔볼 수 있는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기회다. 병 당 못해도 100만 원은 넘는 와인을 감히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도 그때도 마찬가지다. 시음용 와인을 한 잔 받아 들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부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시음용으로 제공된 와인은 아직 숙성 전인 원액이었다. 포도를 수확해 으깨고 이를 발효시켜 술을 만든 후 오크통 숙성을 거쳐야 맛과 향이 완성된다. 아무리 좋은 포도로 만들었다고 해도 원액은 시고 쓴 '술 탄 포도 주스' 맛일 뿐이다. 2013년 가을에 수확해 발효 후 스테인리스 통에서 1차 숙성 중인 와인이었다. 살짝 비웃는 듯한 안 사장님 얼굴이 아주 짧게 눈앞에 어른 거렸다
아쉽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곳을 직접 방문하면 한 모금이라도 ‘진짜’를 마셔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꿈은 산산조각 났다. 먼 미래를 기약하며 다음 와이너리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2016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이례적으로 샤토 무통 로칠드 신제품 출시 행사가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2013 빈티지 라벨 작업을 이우환 화백이 맡았기 때문이다. 제품이 출시되기 전까지 라벨 작업을 누가 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 활동 무대인 한국에서 출시 행사를 개최하기 직전에야 이 사실이 전해졌다.
아주 운 좋게도 이 행사에 초대받았다. 여유 넘치는 척 행동하려 노력했다.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나는 평소에도 이런 와인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기쁘거나 하지 않아요'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흥분을 감추려다 실수로 큰 소리를 내고,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가관이었다.
드디어 서버가 정중하게 샤토 무통 로칠드 2013을 따랐다. 정말 우연히도 2014년 샤토 무통 로칠드를 방문해 시음했던 2013년 빈티지 와인이다. 그땐 그 시고 쓴 맛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 날을 위한 복선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다. 오크통 숙성 전과 후를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마셔보는 건 영광이었다.
오크통에서 2년을 보낸 원액은 완전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철없고 거칠던 녀석이 세상 우아하고 화려해졌다. 그런데 차분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단지 시간이란 마법 밖에 작용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시간은 노력이고 그 자체로 기술이다. 시간은 많은 것들의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안 사장님은 이 와인을 마셔봤을까. 마셔봤다면 언제쯤이었을까. 지금은 어떤 일을 하실까. 카페를 그만두고 단 한 번도 그에게 연락한 적 없다. 그땐 뭐가 그렇게 서운하고 기분 나빴는지 모르겠다. 지금 다시 만나면 그때처럼 와인 얘기로 밤새며 웃고 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은 우리 지난날을 치유해주었을까.
샤토 무통 로칠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