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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베 Mar 29. 2021

교토 와인 여행 2

내추럴 와인과 교토

(2019년 초에 다녀온 여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팬더믹이 종식되어 자유롭게 여행 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구글맵에서 일본 대도시 중심으로 내추럴 와인 바와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을 검색했다. 매력적인 매장이 여러 군데였지만 확 끌리는 곳은 교토의 내추럴 와인 바 코모레비노였다. 내추럴 와인에 빠진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다. 바에만 앉을 수 있고, 그나마 열 석이 채 안 된다. 혼자서 운영할 수 있는 크기였다. 다른 한 곳은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에델바인이다. 관광객들이 굳이 갈 일 없는 한적한 동네에 있다. 사진으로만 봐도 내추럴 와인 종류가 수백 가지는 돼 보였다. 여기다 싶었다.


코모레비노

교토에 도착한 날 오픈 시간에 맞춰 코모레비노에 갔다. 저녁 6시 오픈으로 알고 갔는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사정이 있어 1시간 정도 늦게 연다는 내용이었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7시가 넘어서 돌아왔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내부는 오래된 와인 저장고 같은 느낌이었다. 기운 없어 보이지만 친절한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일본 특유의 매뉴얼을 갖춘 듯한 어투로 메뉴를 설명해주었다. 이곳은 메뉴판은 있지만 메뉴판에 와인 이름이 적혀 있진 않다. 내추럴 와인 3잔 3500엔, 스페셜 내추럴 와인 3잔 5500엔, 오늘의 글라스 와인 1000~3500엔, 와인 한 병 7000엔부터 등 구성은 단출하다. 가끔은 여러 특정 와인으로 구성된 메뉴판을 따로 준비하기도 한다. 모두 잔으로 팔고 와인마다 가격이 다르다. 보통 1000엔대 가격으로 구성된다.



생산량이 한정적인 내추럴 와인 특성상 고정적으로 특정 와인을 구비하긴 힘들다고 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어서 여러 병 주문해도 원하는 수량만큼 받기 힘들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유통사에서 줄 수 있는 물량이 업장별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 수십여 종의 내추럴 와인을 상시 준비해두고 있다. 사장님이 내추럴 와인 마니아기 때문에 안목을 믿고 추천을 맡겨도 된다. 잔으로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것 또한 이곳의 매력이다.


여러 가지를 맛보기보다는 한 병 시켜서 진득하게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내추럴 와인은 공기와의 접촉 시간에 따라 맛이 쉽게 변한다. 시간을 두고 한 병을 다 마셔도 충분히 재미있다. 컨벤셔널 와인보다 공기와의 접촉에 훨씬 민감하다. 이런저런 질문 끝에 8000엔 정도의 유니크한 와인 한 병 추천을 부탁했다. 사장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특유의 느린 움직임으로 셀러에서 하나둘 와인을 꺼냈다. 총 여덟 병을 바에 올려두고 조용조용 설명을 시작했다. 의사소통에 적극적인 분이라 짧은 영어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부족하다 싶은 부분은 번역기를 활용했다. 각 와인의 산지, 품종, 맛의 특성, 와이너리나 와인 메이커의 스토리까지. 참고로 난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정도의 일본어와 그것보다 딱히 높지 않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고민 끝에 조지아 와인을 선택했다. '리시 리미티드'란 이름이었다. 조지아란 나라가 생소하기도 하고 어떤 와인을 만들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유니크’한 것을 원한다면 이것만 한 게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이 아니고선 마셔볼 확률이 거의 없는 와인이었다. 라벨에는 드라이 앰버 와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화이트 와인인데 진한 호박색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내추럴 와인!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 맛에 깜짝 놀랐다. 와인이라기보다는 좋은 중국 차에 가까운 맛과 향이었다. 사장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넓은 도자기 잔을 주면서 거기에도 따라 마셔보라고 안내해주었다. 과거 조지아에서는 유리잔이 아닌 도자기 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기분 탓일까. 차와 비슷한 맛 때문인지 도자기 잔에 마시는 게 더 향기롭게 느껴졌다.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도 한국인 부부가 왔다고 했다. 부쩍 외국인 손님이 늘어서 신기하다며 웃었다. 내추럴 와인이 좋아서 혼자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곳곳에서 찾아와 주니 영광이라고. 코모레비노는 외국인 손님이 유독 많은 곳이다. 유명 내추럴 와인 메이커가 직접 방문하거나 뉴욕에서 온 와인 칼럼니스트가 찾기도 한다. 북적이진 않지만 내추럴 와인 마니아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다.


사장님에게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추천을 부탁했다. 에델바인을 추천했다. 뿌듯했다. 이미 가려고 마음먹은 곳이다. 교토 내에서 에델바인만큼 다양한 내추럴 와인을 판매하는 곳은 없다고 했다. 앱도 하나 추천해줬다. ‘레이즌’이란 내추럴 와인 앱이었다. 레이즌은 건포도라는 뜻이다. 앱은 구글 맵 기반으로 전 세계 내추럴 와인 전문 매장, 취급 레스토랑, 바, 와이너리까지 표시해준다. 인스타그램처럼 피드에 마신 와인을 올려서 공유할 수 있고 와인 라벨이나 바코드를 찍어서 와인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추럴 와인 애호가라면 반드시 내려받아야 한다. 아쉽게도 한국 업장 정보는 많이 표시되지 않지만 해외여행 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앱 내에서 지도를 확대하면 도쿄에만 100곳이 넘는 내추럴 와인 관련 업장이 확인된다. 파리는 300곳이 넘는다. 얼큰하게 취해 다음에 또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 에델바인을 최종 목적지로 두고 이동 동선을 짰다. 숙소 근처에서 카레로 늦은 아침을 먹고 근처 옷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본 후 타마고산도가 유명한 카페로 향했다. 핸드 드립 커피도 함께 시켰다.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창 사이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블루보틀로 향했다. 아주 짧게 커피 한 잔 뚝딱 마시고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꽤 먼 거리지만 에델바인까지 걷기로 했다. 지나는 길에 츠타야서점이 나와서 잠깐 구경하고 결국 에델바인에 도착했다.


에델바인

에델바인의 가게 앞 흰 벽면에 자전거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로로 길게 난 좁은 창으로 실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무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가니 점원이 문 하나를 더 열고 와인을 보러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와인을 제대로 보관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 방이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벽 전체에 여러 종류의 내추럴 와인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가운데 나무 상자에도 종류별로 쌓아 진열해놨다. 천국이다. 그냥 이 공간에 잠시 머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정확히 세어보진 못했지만 어림잡아 300종류는 되어 보였다. 세계 각지 내추럴 와인과 일본에서 생산하는 내추럴 와인까지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코모레비노 사장님이 반드시 추천을 받으라고 했다. 종류가 너무 많아 추천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일단 10여 분을 말없이 구경했다. 내추럴 와인은 라벨도 개성이 넘친다. 친구들끼리는 내추럴 와인 라벨만 보고 골라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한다. 신기하게도 높은 확률로 성공했다. 와인 라벨에는 와이너리의 철학과 취향과 개성이 녹아 있다. 라벨 이야기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여기까지만.



점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 와인은 어떠냐, 이런 느낌의 와인이 있냐, 가메 품종으로 만든 와인 중 무엇을 추천하느냐, 일본 와인 추천해줄 것도 있느냐 등등. 짧은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다. 일종의 놀이였다. 맛과 향과 스타일과 품종과 나라 정도만 영어로 말할 줄 알면 아주 친절히, 진지하게 와인을 추천해줬다. 다섯 병을 사고 말았다. 2만 엔이 안 되게 나왔는데 8000엔이 넘는 걸 한 병 샀으니 나머지는 1000~3000 엔 사이다. 와인 종류도 종류지만 가격이 너무 저렴했다. 한국이라면 와인 매장에서 내추럴 와인을 사려면 최소 6만~7만 원 정도는 줘야 한다. 물론 면세 범위 이상으로 들고 가면 관세와 주세까지 더해 한국과 크게 가격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한국에 다 들고 가는 건 무리라 가장 좋은 와인 한 병을 제외하고 여정 내에 다 마셨다. 교토에 있는 동안은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 오사카로 이동해서는 거기 사는 한국 친구 집에 이틀 더 머물며 총 네 병을 해치웠다.


마지막 한 병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시는 중이다. ‘에르데’란 이름의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이다. 에르데는 독일어로 지구, 대지 등을 뜻한다. 영어로 ‘어스’와 같은 말이다. 셉 & 마리아 머스터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들었고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을 블렌딩했다. 유리병이 아닌 토기에 담겼고 대지와 지평선, 석양을 미니멀하게 표현한 라벨도 멋스럽다. 내추럴 와인 시음회 ‘살롱 O’에서 시음해본 와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묵직하면서도 복잡한 향이 좋았다. 한국에도 곧 수입되지만 한국에서 유통되기를 참지 못하고 교토에서 먼저 사온 것이다. 내추럴 와인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여행 스타일은 그중 하나다. 무엇을 좋아하느냐는 결국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1편부터 보기



2019년 <더 네이버>에 기고한 본인의 글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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