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중,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린 우리.
8월 23일 발리로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남편의 외마디 외침으로 아침을 맞았다.
남편의 업무 중 중요한 부분 하나가 일이 생겨 난감한 상황이 생긴 것.
상황을 간단히 들은 나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조용히 물을 올리고 컵라면을 먹은 후 남은 짐을 꾸렸다. 사실 자칫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걱정은 됐지만 역시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떠날 시간이 되어 남편은 급한 대로 일을 마무리 짓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솔직히 이때 나는 걱정보단 발리로 향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던 거 같은데...
분명 우리는 방콕에 있을 때 e-Visa를 받아 나트랑에 온 건데, 입국 심사 때 받은 도장은 15일 무비자 도장이라고 한다. 분명 입국 심사 때 e-Visa를 확인시켜주려 했지만 괜찮다고 그냥 가도 된다는 말에 입국을 했을 뿐인데... 괜히 그때 룰루 랄라 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입국했던 나 자신을 쥐어박고 싶어 졌다. 우린 8월 15일 부로 불법체류자가 되어있었다.
공항 내 이민국 직원과 이야기하며 왜 잘못된 건지 물어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다시 시내로 돌아가 이민국을 방문하라고 할 뿐! 3시간 뒤면 출국해야 하는 상황인데 여기서 벌금을 물고 떠나도 괜찮겠냐는 질문에도 여전히 시내에 있는 이민국에 방문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비자 내용을 보여주며 호소를 해도 '그럼 너희가 입국할 때 제대로 질문을 했어야지.', '그 직원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너희가 물어봤어야 해.', '도장도 너희가 확인해야지? 도장에 찍힌 숫자가 제대로 됐는지.'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다.
왜 이게 우리 책임인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구금되고 싶진 않았기에 쓴소리를 삼키고 조용히 택시에 올라탔다. 나는 속으로 '공항 이민국은 별 기능이 없네...'라고 빈정댔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랩 기사가 내려준 곳은 나트랑 시내의 한 쇼핑센터. 출발 전 공항의 이민국 직원이 구글맵에 찍어준 주소로 왔는데 내려보니 엉뚱한 곳이었다. 주변 경찰서에 물어보니 또 엉뚱한 곳을 알려줘 결국 구글맵에 'Immigration office'를 검색해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 시간은 오후 12시 5분, 더운 날씨에 30분가량 헤매다 도착한 이민국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길만 헤매지 않았다면 점심시간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었을 텐데 뭔가 제대로 꼬인 날 같다. 나는 또 멍하니 '2시까지 점심시간이라니 복지가 좋구먼.' 하고 속으로 해탈에 가까운 웃음을 지었다...
굳게 닫혔던 이민국 문이 2시가 되자 열렸고, 이민국 직원에게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했지만 안타까워할 뿐... 어쩔 수 없이 벌금과 비자 재발급 비용을 내야 한다며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럼 당장 벌금과 재발급 비용을 낸다고 하니 여기선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이민국이 아닌 비자 대행사를 통해 비자 신청을 해야 하므로 또 그쪽으로 가보라며 서랍 안쪽에서 명함을 꺼냈다.
또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치는지 평소 평온한 남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차라리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느 하나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이도 없이 그냥 순순히 따라야 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 느껴지는 순간이다.
난 속으로 '이거 뭐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직무유기구먼...' 빈정댔더니 기분이 또 괜찮아졌다.
아침부터 계속 꼬이고 꼬이는 일진에 비까지 맞은 남편이 굉장히 짜증이 난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치아를 드러내고 웃어 보일 뿐.
철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약간 지쳐가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신기할뿐더러 재밌었다. 내가 조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편이 든든해서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까지 화가 나있으면 결국 감정은 서로에게 번지기 마련... 이 상황에서 나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하니 웃는 거밖에 할 게 없더라. 여담이지만 나름 나도 슈퍼우먼(?) 느낌인데 남편이랑 있다 보니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된 듯 하다. 내 철없는 말이 남편한텐 꽤 재밌는지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이후에도 많은 상황이 저녁까지 반복되는 문제에 서로 지쳐있었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앞으로 더 잘 풀리려고 더 재밌으려고 그러나보다.' 너털웃음 지으며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늦은 저녁, 지친 몸에 이불을 두르고 누워 하루 종일 캐리어를 이리끌고 저리끌고 고생한 서로를 도닥였다. 마음을 가볍게 먹고 나니 "나 없었으면 우리 남편 아직까지 열받아있겠당~", "배짱이는 나 없었으면 오늘 하루 종일 발 동동 구르고 있었겠다~" 하며 장난도 칠 정도로 마음이 진정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이야기 했지만 정말 남편이 없었다면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발만 동동 굴렀겠지... 내 몫까지 혼자 짊어져야 했던 무게 때문인지 이 날 밤 피곤함에 찌들어 침대에 녹아들어가는 남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참 고마웠다.
있잖아, 유독 일이 안 풀리는 날
정말 이 날이 운수가 안 좋은 날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