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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부부 Sep 09. 2019

불법체류자가 된 우리가 받은 호의

운수가 좋지 않던 그 날, 사실 운수가 나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너희를 다시 못 본다니 정말 아쉬워."


나짱 스노클링 투어에서 만난 샤이가 우리를 집에 초대했다. 하지만 출국을 앞두고 이래저래 바쁘다는 이유로 출국 이틀 전, 그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샤이는 괜찮다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빠른 시일 내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출국을 못했다고? 그럼 우리 집으로 와!"


8월 28일, 비자 문제로 나트랑을 떠나지 못했을 때 머물 곳을 생각하니 바로 샤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샤이, 안녕? 우리는 망할 비자 문제 때문에 발리로 떠나지 못하게 됐어. 너희 집에 방이 남아있다면 우리가 머물러도 괜찮을까? 답변 부탁해!]라고 메시지를 남기자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정원을 가꾸다 비를 흠뻑 맞았는지 스마트폰 속 샤이는 비에 젖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샤이는 흔쾌히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지금은 정신이 없을 테니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하자며 손짓과 함께 'Come on!'을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샤이는 텍스트보다 영상통화가 편했던 것 같다.




"세상에. 샤이! 집이 정말 멋져!"


구글 지도는 차가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길을 알려주었고 우리와 택시기사는 아리송해하면서도 거침없이 그 길을 들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울렸지만, 보이는 건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은 땅과 그 위에 풀을 뜯는 소, 소란스러운 제비 떼가 살고 있는 폐가 그리고 그 반대쪽의 알록달록한 대문이었다.


일단 내려서 알록달록한 대문을 기웃거리자 열린 문 틈으로 여러 마리의 개들이 달려 나왔다. 꼬리로 친근함을 표시하며 몸을 세워 내 몸에 발도장을 찍는 녀석들이 귀여워 쓰다듬고 있자 문 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반겨주었다. 제대로 왔는가 싶었는데 제대로 왔지 싶어 안심하던 순간이다.



샤이가 손수 관리한 정원. 최근에 저 가로등을 놓았다고 한다. 우기 때엔 이 정원이 전부 물바다가 된다는 슬픈 이야기...


커다란 꼬리를 헬리콥터처럼 흔드는 개들과 함께 대문을 들어서자 구름이 피어오른 샤이의 마당이 또 한 번 반겨주었다. 마당 풍경은 우리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내린 소나기 그리고 나트랑의 더운 열기가 만들어낸 그림이었다.


홈스테이를 운영하는 그는 여러 개의 방들을 보여주며 원하는 곳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했다. 방 안은 그가 손수 만든 옷걸이와 전등 그리고 가구들이 다채롭게 꾸며져 있었다. '*Colours Land Home'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컬러풀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였다. *Colours : 색, 빛깔, 총천연색의, 컬러의



손수 샤이가 직접 꾸몄다는 방들. 색감이 참으로 예뻤다.




"샤이 정말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하루 종일 더위와 싸우며 땀에 절어 돌아다닌 몸을 씻고 짧게 휴식을 취한 뒤 샤이를 찾아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 한편에 컬러풀한 문으로 꾸며진 공방에서 샤이는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 비자 대행사 직원이 준 '친구네 집에 방문하면 꼭 이 번호로 연락 줘.'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입을 떼었다.


비자 문제로 우리의 체류 장소를 증명해야 하기에 집주인인 샤이가 대행사 측에 연락을 해야 했다. 샤이는 우리의 사정을 듣고 흔쾌히 알겠다며 본인의 친구에게 일처리를 부탁했다. 그도 베트남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에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듯하다. "너희 기억하지? 그때 스노클링 투어에서 만났던 션이 도와줄 거야." 이내 샤이는 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상황을 설명했고 그녀도 우리의 문제를 흔쾌히 돕기로 했다.




아치형 구조와 파스텔 색상이 예쁜 Colours Land Home 그리고 알록달록 그의 공방이 감각적이다.



"배고프지? 손님이 올 줄 몰라서 차린 건 없을 거지만 함께 저녁 먹자."


아침 이후에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끼니도 잊고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저녁식사라는 말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션과 통화 후 우리는 샤이를 따라 저녁식사가 차려진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엔 노부부가 우릴 맞아주었는데, 샤이는 그들을 친구의 부모이자 본인의 또 다른 가족이며 Colours Land Home을 돌봐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린 그들이 준비한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한 저녁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샤이의 집을 돌봐주는 하우스키퍼이자 식구인 그녀.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식사 후 샤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노부부 중 남편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나트랑에서 나고 자랐으며 3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이 있다고 한다. 자식들을 키우려 평생을 농사일만 해오다 나이가 들어 지금은 쉬고 있다며 짤막한 영어로 거침없이 설명했다. 그의 나이는 83세. '와, 베트남을 떠나본 적 없는 전직 농부 아저씨가 어떻게 우리와 영어로 대화할 수 있지? 심지어 나보다도 잘해!' 나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아마 샤이를 만나서 함께하는 시간 동안 배우신 거 같다.




"베트남 정부 사이트에서 너희 신상조회가 불가능하다네?"


정신없이 전직 농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몰려왔지만 션에게서 일이 처리됐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잘 수 없었다. 때마침 션과 통화를 마친 샤이가 돌아왔고 그에게서 착잡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체류하는 동안 우리의 위치가 파악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신상이 조회되지 않는다는 것. 아마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이 호텔이 아니어서 조회가 불가능했던 거 같다.


혹시라도 현지인이 아닌 외국인 신분의 샤이에게 피해가 갈까 봐 시내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겠다고 하였지만 샤이는 괜찮다며 션에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두었다고 한다. 오늘은 어차피 시간이 늦어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며 션에게 다시 한번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 방에서 쉬고 있도록 해. 션에게 연락 오면 너희에게 알려줄게."


아래층으로 돌아가 우린 그저 손 놓고 있는 게 불안해 내일 날짜로 호텔을 예약한 후 아침이 되자마자 시내로 나가 빠른 체크인을 하기로 계획했다. 우리의 비자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만일 우리로 인해 샤이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건 더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우리가 불청객이 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할 때 샤이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은 거 같아. 가능하면 잠깐 와줄래?]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남편은 차분히 그를 만나러 갔다.




"정부 사이트가 다운됐대."


샤이에게서 전달받은 션의 말은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지만 결국 우리가 호텔로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최악인 건 정부 사이트가 다운돼서 내일 비자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어 샤이는 "나는 너희가 우리 집에 더 머물었으면 하지만 문제가 이렇게 돼서 안타까워. 너희만 괜찮다면 돈은 받지 않을 테니 호텔은 따로 예약하고 우리 집에 와도 좋아." 스노클링 투어 때 처음 만난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나였으면 귀찮았을 텐데 샤이와 션은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당장 갚을 수 있는 건 멋진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귀찮게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내일 짐을 싸서 나가기로 했고 아쉬움 대신 우리가  멋진 저녁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후 샤이는 택시가 오기 전까지 우리와 함께 마당을 거닐며 정원을 장식하는 꽃들을 설명해 줬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데 그곳에서 얻은 씨앗들을 심어 정원을 꾸민다고 한다. 정원 곳곳에는 신기한 꽃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예쁜 곳에서 더 머물 수 없다니. 정말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Colours Land Home과 이별을 했다.




"너흰 돈 내지 마."


마침내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저녁에 샤이를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할 생각을 하니 엄청 기대되었다. '엄청 비싼 걸 대접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식사를 다 마친 샤이는 우리에게 돈을 내지 말란다. "너흰 내 손님이잖아. 저녁은 내가 살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도 멋진 저녁식사 비용까지 부담한다고? 본인이 소개한 식당이고 본인의 손님이기 때문이라는데, 과분한 마음에 더치페이로 겨우 합의를 봤다.



샤이의 추천으로 가게 된 길거리 우롱 밀크티 카페. 맛이 굉장히 좋다!


"샤이, 새벽 3시에 나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식사를 다 마치고 난 시간은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간. 샤이는 친구가 운영하는 길거리 카페로 우리를 안내했다. 낮고 알록달록한 테이블과 의자가 매력적인 이 카페는 K-Pop을 좋아하는 샤이의 친구가 운영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샤이가 나무 위의 호텔에서 머물었던 이야기와, 이름도 알기 어려운 아주 작은 나라에서 있었던 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꽃 씨앗을 모아 정원에 심은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넘었다. 새벽 3시에 일정이 있는데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 가서 자면 돼!"라며 쿨한 손짓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우리가 너무 번거롭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도 즐거웠나 보다. 아니면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더 쿨하게 했을지도...



내 얼굴 무엇? 맨 앞은 우리 부부 그리고 차례대로 샤이 친구의 아버지(전직농부 아저씨), 샤이 친구의 어머니, 샤이, 샤이 친구! 션은 이날 일정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ㅠㅠ


샤이와 우리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났지만 사실상 그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그의 생각은 젊고 건강했다. 유대인인 그의 종교는 유대교이지만 불교의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는 승려복을 입는다. 빗자루 하나를 들고 샤이에게 다가와 사달라 말하는 노인을 무시하지 않고 그 가격의 몇 배를 지불하면서도 노인이 부담스럽지 않게 거스름돈을 거절한다. 그의 홈스테이 하우스는 시내의 외곽에 있어 운영이 어렵지만 그래도 수익의 일부를 어려운 아이들에게 쓰는 게 바람이란다. 그는 그가 베푸는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본인의 위치에서 권위를 표하지도 않았다.



이 멋진 사람을 우린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결코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샤이, 만약 네가 한국에 와서 우리에게 연락을 한다면, 우린 모든 시간을 비워둘 거야. 그 때라도 우리가 너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게 해 줘. 아마 너의 그 호의는 값을 매기기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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