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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뭔가가 변했어



여행을 하면 내 안의 뭔가가 변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는 것일까? 이전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고, 실천의 열정이 내심에 감춰진 경우에는 불분명하거나 불투명한 생각이 어느 정도의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스러운 장거리 여행이라면 당사자에게 있어 일종의 정신적 순례길이 된다. 우리에게는 일상성이나 틀에 박힌 구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미학적 욕망을 간직한 채로 경계선 밖으로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육신의 고행은 생각의 고행을 낳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사고의 비약적 고양을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체 게바라의 23살 즈음을 보여주는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일상의 삶에 지쳐 있을 때 볼 만한 영화라고나 할까? 원작은 체 게바라의 <Diarios de motocicleta>이다. 전형적인 로드 무비인데, 월터 살레스 감독은 <중앙역>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 잘 맞는 듯하다. 정서적이면서도 탄탄한 연출이 느껴진다. <중앙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출을 맡은 감독과 제작을 맡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합작품이다. 두 사람 모두 매력적이다. 로드 무비는 사실 어딘가를 향해서 가긴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거나 목적지 자체는 의미가 없다.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 히치콕의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개하는 어떤 이미지나 장치인데,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까지 두 사람이 여행하는 여정을 보여주는데, 베네수엘라까지는 가지 못하고 페루의 나환자촌을 하이라이트로 하여 마무리된다. 하지만 험난하고 기나긴 여정에서 체 게바라는 뭔가가 변하게 된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찌들고 궁핍하게 된 사회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천식을 앓고 있는 자신의 몸을 각고의 노력으로 단련하게 된다. 도래할 신성한 임무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킨 셈이다. 사회적 이슈는 영화에서 사람들과 사람들 간의 따뜻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정서적으로 묘사되고, 첨예한 계급 갈등이나 대립의 양상으로까지 영화를 그리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서의 소양을 닦아가는 여정이라고나 할까? 혁명가로서의 체 게바라가 워낙 유명세를 타고 다양한 방면에서 상품화까지 되어버리긴 했지만, 영화에서 그의 순수성과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포용력은 충분히 느낄 만큼 잘 묘사되어 있다. '에르네스토'라 불리는 체 게바라와 동행하는 다른 인물이 먼 친척이자 몇 살 위의 친구 혹은 형인 알베르토인데, 두 사람의 케미가 대단히 돋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알베르토라는 인물을 너무 덜떨어진 인물로 묘사했다고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훨씬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캐릭터이다.



알베르토 그라나도(1922~2011)는 나중에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산업상으로 재직 당시에 그의 요청으로 쿠바로 건너가 의과 대학을 설립하는 등의 재건 활동을 했으며, 그곳에서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는 생화학자이자 의사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쓴 책이 <Con el Che por Sudamerica>인데, <남미에서 Che와 함께>로 번역된다. 이 책은 영화 제작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의 사실적인 여행기인 셈이다. 영화는 체 게바라가 화자가 되는데, 그의 일기가 원작이고 엽서와 편지 등이 내레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알베르토의 실제 나이 든 모습이 나온다.



여기에 보면  게바라가 시를 읊조리는 장면이  군데 나온다. 초반에 여행을 떠나면서 낡은 모터사이클에서 이름을   없는 시인의 시를 읊조리고(상영 17 전후), 나중에 모터사이클이 고장 나서 누군가의 트럭을 얻어 타고 칠레의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에 도착할 즈음에 네루다(1904~1973) 시를 읊조린다(상영 50 전후).  게바라가 네루다의 시를 암송한 이유는 발파라이소에 네루다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도시를 소재로  네루다의 시가 있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며, 네루다가 무엇보다 저항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정권에 시달린 칠레 사람들에게 네루다는  오랜 기간 동안 저항의 상징이었다.



(익명의 시인의 詩)


선상의 물을 밟는

맨발의 소리


허기진 그 모습

공허하고 어두워


눈물이 빗물에 섞여

비통함도 아른거리네



(네루다의 詩)


발파라이소 내 사랑


갈 길을 인도하고

빛을 비추네, 바다의 신부여


비구름에서

점점 멀어지네



네루다의 詩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시를 꼽으라고 하면, 역시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詩이다. 그냥 <시>로 번역되기도 한다. 아래의 시는 <네루다 시선>에서 정현종 선생의 번역이다. 詩에서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이라는 표현이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우러진다.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는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때에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날뛰게" 된다.



<시가 내게로 왔다>


그러니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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