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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비 Oct 09. 2024

엄마가 내게 먹인 건, 봄 그리고 사랑

엄마밥은 살 안 쪄

    온몸에 열꽃이 피어올랐다. 나도 모르게 온몸을 긁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긁어서 피가 나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이게 가려운 것인지 아픈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사그라들고 봄 기운이 드나들기 시작한 때라 처음엔 건조한 계절 탓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달이 넘어가도 나아지지 않고 잠 못 드는 날들이 늘어났다. 어지간해서는 잘 가지 않던 병원에 가 보니 원인 불명의 두드러기라고 했다. 면역력을 늘려 준다는 10만 원이 훌쩍 넘는 링거를 맞았고, 스테로이드제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았는데 100일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두드러기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약 올리듯 턱밑과 발가락 사이사이, 등뼈 위와 겨드랑이, 손바닥과 허벅지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벅벅 긁다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무엇이든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하는데, 원인 불명이라고 하니 끝없는 미로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막막한 날들에 지쳐 (결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죽고 싶다는 말도 함부로 내뱉었다. 


비밀은, 엄마밥

    가렵고 따갑고 화끈거려 잠들지 못하는 육체적 고통은 고문에 가까웠고, 낫는 방법을 몰라 헤매는 막연한 마음은 조금씩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먹지 말라는 형벌이었다.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하루도 잠을 잘 수 없는데, 알러지 반응을 줄여 주는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는 동안은 알러지 검사를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원흉을 알 수 없는데 왜 갑자기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먹지 말라는 것인가!? 청천벽력 같은 식단 처방에 의사 선생님께 원망스런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더니 돼지고기와 밀가루에는 대부분의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보통 원인 불명의 두드러기가 올라올 경우 내리는 처방이란다. 밥보다 빵과 면을 주식으로 삼던 삶이었고, 고기 중에서도 최고는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로 꼽던 나였다. 돼지고기 중에서도 항정살이나 오겹살처럼 기름기가 쟐쟐 흐르는 부위를 좋아하고, 신혼 초 요리 초보 시절에는 ‘왜 기름기도 없는 소고기로 국을 끓이나?’ 싶어서 돼지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가 한솥을 왕창 다 버린 적도 있었다.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끊으라는 소리는 마치 곡끼를 끊으라는 말과 같아서 착잡함에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직업에 ‘선생님’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범생이 DNA가 절로 발동하여 철썩같이 믿고 따르던 나였지만, 이 처방만큼은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기에 처음엔 처방을 무시하고 계속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먹었다. 원래 금단의 영역은 유혹의 손길이 더 요망한 법. 먹지 말라고 하니 반항심과 욕구가 시너지를 일으켜 더 많은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그 끝은 돼지고기와 밀가루가 조우하는 최고의 컬래버레이션 ‘돈.까.스’였다. 결국 그날 밤은 하얀 침대 시트에 선홍색 핏방울이 흩뿌려질 정도로 온몸을 긁으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 얄밉고 가증스러운 오돌토돌한 두드러기에 굴복하여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식탁에서 밀어냈다.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먹지 못한다는 것은 일상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회사 식당에서 메밀국수와 전병이 나오는 날에는 맛있는 고기 반찬인 전병은 손도 대지 못하고 슴슴한 메밀국수만 먹었고(물론 메밀국수도 좋아하지만 난 이미 전병맛도 알지 않는가!), 친구들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한 날에는 피자와 파스타를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굴비 보듯 쳐다만 볼 뿐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건 샐러드란 이름의 풀떼기와 죽 같은 리소토가 전부였다. 이렇게 가려 먹는다고 해서 두드러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방법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려움증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몸이 솜털만큼만 가벼워졌다. 살이 빠졌다는 소린 아니고 붓기가 빠졌달까. 평소에도 하드코어 오가닉 유저에 틈만 나면 집에서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돼지고기와 밀가루를 주식으로 삼았던 탓에 몸에 염증이 쌓였었는지 몇 주간의 노력이 어떤 형태로든 계단식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우하향 직선으로 내리꽂던 내 몸의 이상 신호가 드디어 우상향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묻혀 있던 질문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두드러기를 겪기 전까지 근 사십 년 동안 어떻게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었을까?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할 수 있었을까? 답은 파랑새처럼 바로 앞에 있었다. ‘엄마밥’. 


엄마가 먹인 서른여덟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지금도 사회생활을 하는 스스로가 기특할 정도로 세상 예민 보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건 후각과 미각이다. 오감 중에서도 특히 맛을 느끼고 판단하는 감각. 학창 시절에 더욱 꽃피던 예민함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급식을 먹을 때, 나는 혼자 엄마표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곤 했다. 남들은 술 마시고 뻗어 늦잠을 자거나 과제로 밤을 새우느라 아침을 거른다고 하는 대학생 때도 나는 제시간에 일어나 엄마밥을 먹고 캠퍼스로 향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다치면 엄마한테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해서 엄마밥을 먹으며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인생은 돌밥돌밥(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이었을 텐데,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고 한 적이 없다. 엄마의 직업은, 엄마의 본분은, 가족을 알뜰살뜰 챙겨 먹이는 일이라고, 그렇게 해서 가족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엄마는 더없이 행복하다고, 늘 웃는 얼굴로 밥을 지었다. 

    두드러기로 시작된 고생길에서도 틈만 나면 찾았던 건 ‘엄마밥’이었다. 아무리 내가 요리를 좋아하고 잘한다 하더라도 내가 챙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내 요리는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다.) 24절기에 맞춘 제철요리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비집고 나와 고개를 내미는 나물의 새순들- 땅두릅, 개두릅, 달래, 냉이, 쑥, 돌나물을 손톱 밑이 까매지도록 다듬고 데치고 무쳐서 엄마가 우리에게 먹인 것은 봄이었다. 장마와 무더위로 고생하는 여름에 수박을 써는 것도 더운 일이라며 깍둑썰기로 잘라 낸 수박 조각들을 단정하게 타파웨어에 넣어 주는 건 바로 엄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도다리, 알이 꽉찬 쭈꾸미, 민어, 전어, 과메기, 방어, 새조개로 국을 끓이고 살을 데치고 회를 떠오고 해감을 해서 잔칫상을 꾸린 것도 엄마. 지금처럼 하우스 재배가 많지 않던 시절, 한겨울에 눈을 뚫고 새빨간 딸기를 사온 것도 모두 엄마였다. 엄마가 먹인 서른여덟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동안 쌓인 사랑이 세포가 되고 피와 살이 되어 나를 지탱해 줬던 것이다. 


    가려움증의 클라이맥스에서 신체 변화의 방향성이 성장이 아닌 노화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무쇠도 씹어먹던 위장(胃腸, stomach)의 리즈 시절에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간 무탈했던 까닭이,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남들 겪는 두드러기를 처음 겪게 된 이유가, 평생 ‘엄마밥’이라는 보약을 지어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자 덜컥 겁이 났다. 어느 날부터 부쩍 작아진 엄마의 어깨가, 요즘 들어 자꾸 마디마디가 아프다고 하는 엄마의 손가락이 걱정되었다. 평생을 부엌에 서 있어서 퍼렇게 불거진 핏줄로 무장한 종아리를 하고서, 갖다 주지 말라고 애원해도 현관 문고리에 반찬을 가득 걸어 두는 엄마. 정말 무서운 건 엄마와의 시간은 결국 시한부라는 사실이다. 백세 시대에 엄마가 백두 살까지 살고 간다면 주변에서는 호상이라 하겠지만, 백세 살까지 살길 바랄 미래의 내 마음. 엄마밥을 먹고 자라 건강을 뽐내 놓고서 엄마가 고봉밥을 주고 반찬을 싸 주면 다 먹지 못한다며 신경질을 부리던 어제와 엄마밥을 먹을 수 있는 끼니수가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걸 깨달은 오늘은 절대 같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아기가 생기기 전과 후가 다른 것처럼 세상이 바뀌는 일. 원인 불명의 두드러기를 겪으며 발견한 건 조건과 이유가 모두 생략된 사랑,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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