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밥은 살 안 쪄
나는 왕따였다. 그것도 제법 오래. 누군가를 따돌리고 언어나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미워할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집단으로 소수를 괴롭히는 건 특히 잔인한 일이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내가 따돌림을 받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고지식하고 눈치도 없어 최신 유행이나 대세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래도 제일 가는 이유는 바로 내 도시락이었다.
급식 시설이 생기기 전이었다. 지금은 교실마다 개인 사물함과 신발장이 있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교과서가 한가득 들은 책가방과 실내화를 넣고 다니는 신발 주머니, 수업에 따라서는 미술 도구나 악기, 그리고 도시락 주머니까지 들고 다녀야 했다. 가끔 폐지를 모으는 날에는 온갖 주머니와 쇼핑백이 손목에 매달려 피가 통하지 않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등교를 해야 했다. 초등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사용하는 악기는 탬버린, 리코더, 단소 정도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판매하는 대량 생산형이라 전국민이 같은 스팩을 사용했다. 폐지도 가정에 따라 조선, 동아일보냐 한겨레를 읽느냐 정도의 차이였지 무게를 채운 종이더미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실내화도 마찬가지였다. 새것이냐, 빨았느냐의 차이에 따라 하얀색과 회색 사이를 오갈 뿐 우리는 모두 같은 헤어 스타일에 같은 옷,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물건을 썼다.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다른 물건은 공책이나 팬 같은 학용품, 그리고 도시락이 전부였다.
사실 도시락도 아이들마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같은 브랜드의 2~3단짜리 보온 도시락통을 사용했고, 반찬도 엄마들끼리 뒤에서 식단표를 공유한 것 마냥 거의 똑같았다. 가장 밑에 칸에는 밥이 들어있었고, 중간에는 불고기, 제육볶음, 핑크색 소시지, 용가리 튀김 같은 따뜻한 고기류가 한 칸, 나머지는 김치나 밑반찬, 때에 따라 김이 추가된 구성이었달까. 이제 도시락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싸는 입장이 되어보니 저 구성을 갖추기 위해 엄마들이 얼마나 영양학적으로 고민하면서도 도시락 싸는 시간 효율의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했는지 눈에 보인다. 하지만, 내 도시락은 같은 학년 370명의 도시락 사이에서도 한 번에 발라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달랐기에 영양과 제작 효율 같은 주제는 애초에 끼어들 수 없었다.
예컨대 학부모들 사이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이런 거였다. “우리 딸이 그러는데, 아린이 도시락은 밥에서 항상 김이 난대요. 도시락통은 뭘 써요?” 여기에 대한 답을 들으면 다른 엄마들을 혀를 내두르며 일찌감치 따라하기를 포기했다. 내 도시락은 왜 4-5시간이 지나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냐고? 그건 엄마가 미리 끓여 놓은 뜨거운 물에 도시락통을 담가 열 전도율을 높인 다음 밥을 퍼 담았기 때문이다. 물론 뜨거운 밥만 싸간 건 아니었다. 찹쌀 가루를 묻힌 소고기에 팽이버섯, 당근을 말아 시금치로 동여맨 찹쌀소고기야채말이, 하이얀 밀전병에 샛노란 계란 지단과 싱그러운 초록 야채들, 불고기를 싸먹을 수 있게 만든 구절판, 캐러멜라이징이 된 양파가 잔뜩 들어있는 항정살 고추장 볶음은 내 최애 메뉴였다. 봄에는 빠당빠당하게 잎사귀를 편 돌나물에 초고추장을 담아갔고, 여름엔 꽃잎 모양의 당근, 얇게 저민 아스파라거스, 실처럼 야들야들하게 썬 버섯을 볶아 초밥에 버무린 야채 초밥을 싸갔다. 내 도시락은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항상 오방색의 반찬으로 반짝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해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풍 때면 꼭 반장이나 부반장 학생의 엄마가 선생님의 도시락을 싸는 것이 관례였지만, 나의 학급 임원 당선 여부와는 상관없이 선생님의 소풍 도시락은 늘 우리 엄마 몫이었다. 한 가운데 볶은 소고기를 중심으로 노오란 지단이 궁합을 이루는 김밥, 당근과 소고기가 송송 박힌 유부초밥, 형형색색의 과일들을 3단짜리 도시락에 싸오는 학부모가 또 있을까. 엄마는 내 도시락에 물도 항상 2개씩 싸줬다. 보온병에 든 보리차나 결명자차, 그리고 패트병을 꽁꽁 얼려놓은 얼음물까지.
하지만 진짜 압권은 앞에 나열한 보기 좋고 맛 좋고 보온 보냉이 유지되는 도시락에 있지 않았다. 그건 바로 매일 매일 바뀌는 식탁보와 물수건이었다!!!
급식 시설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린 각자가 속한 교실, 책상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책상은 공부를 하는 가구지만, 벌을 설 때 올라서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면서 신발을 신은 채 밟고 뛰어다니기도 하는 활동 도구이기도 했다. 미술 시간에 엎지른 물감을 누군가는 휴지로 쓰윽 닦고 내버려두었고, 조각칼로 장난을 친 아이들 때문에 한 귀퉁이에서는 톱밥이 끝없이 갉아져 나왔으며, 수업시간에 사용한 지우개똥이 굴러다니기도 했다. 그런 책상에 도시락통을 펼쳐놓고 밥을 먹는다는 것이 엄마의 위생 관념에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닐 것이다. 엄마는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을 테니. 다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선들을 모으고 모으다 보니 식탁보와 물수건이 등장한 것이다. 식탁보는 매일 바뀌었다. (반찬을 떨어뜨리니까 매일 세탁은 기본!) 일본 퀼트 시장에서 구한 천으로 학교 책상 사이즈에 맞게 손수 제작한 식탁보, 미국에서 사온 빅토리아풍의 테이블 매트,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새하얀 광목천까지 그 색과 재질은 매일 달랐다. 물수건은 무엇이냐고? 지금처럼 물티슈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던 터라 마치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기 전 내어주는 물수건 같은 것을 별도의 물수건 전용 플라스틱통에 싸준 것이다(대체 그런 건 어디서 구했냐고요). 덕분에 항상 깨끗한 손으로, 반찬을 흘려도 다시 집어먹을 수 있는 안전한 식탁보 위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는데, 패착은 여기에 있었다.
남과 다른 것, 개성이 강한 것, 유난을 떠는 것은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집단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요소였다. 그 중에서도 내 별난 식탁보와 물수건은 나를 결벽증이 있는 아이로 보이게 해주었고, 남들과 나를 구분 짓는 선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요령도 없었다 싶은 내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식탁보와 물수건을 혼자 사용하는 것이 또래집단에서 문제 요소라는 걸 알았을 때, 엄마한테 이건 싫다고 말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고, 설령 말하지 못해 학교에 여전히 식탁보와 물수건을 챙겨 갔어도 사용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었을텐데. 미움 받는 걸 알면서도 새벽부터 준비해준 엄마의 정성을 외면하는 게 미안해서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식탁보를 꺼내 들었던 열 네살의 나도 참 미련한 외골수였다.
엄마의 지나친 정성은 도시락이 전부가 아니었다. 엄마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아침 식사에 제상도 아닌데 국과 찌개, 고기와 생선을 올렸고, 제철 나물과 샐러드, 계란 후라이와 9첩 반상을 준비했다. 몇 없는 친구들이 놀러 올 때도 엄마는 온갖 솜씨를 부려 오븐을 이용한 그라땡이나 도리아, 새우살을 다진 핫 샌드위치를 만들어줬으며, 간식으로는 당근 케이크를 구워줬다. 이런 요리들은 엄마가 평생 수집해온 멋지고 예쁜 그릇에 플레이팅 되었다. 라면 하나 냄비째 나가는 일이 없이 속이 깊고 까만 옻칠에 자개가 박혀 있는 일본 라멘 그릇에 담겨졌고, 케이크는 엷은 파스텔 컬러의 잔 꽃무늬가 흩뿌려진 케이크 전용 플레이트에 서빙되었다. 과일도 손님 앞에서 깎는 일이 없었다. 일식 코스 요리를 먹고 나서 만나게 되는 토끼 모양의 사과와 양갱을 로얄 코펜하겐 접시에 1인 1플레이트로 내어주었다. 자몽 같은 시트러스류는 입안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속껍질까지 모두 발라서 크리스탈 화채 그릇에 주었다. 집에 한 서른 번 정도 놀러와야 겨우 그 친구가 먹고 싶다는 짜장면을 시켜줬던 우리 엄마. 어떤 친구는 이런 우리집에 한 번 놀러 왔다가 내가 공주병에 걸렸다며 다시는 나랑 놀아주지 않았고, 어떤 친구는 집에 가서 우리집과 자기집을 비교하는 바람에 그 집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항의하는 전화를 걸었다. 나는 종종 엄마의 정성 어린 식탁이 부담스러웠고, 남들처럼 분식집에서 싸온 비닐 봉지에 있는 그대로 떡볶이를 먹고 싶었다. 소풍 날에는 촉촉한 계란 지단이 들어간 김밥이 아니라, 김가네에서 사온 참치김밥과 김치김밥을 싸가고 싶었다. 남들과 같게, 눈에 띄지 않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맛있는 걸 해주고 잘 먹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의기양양하고 뿌듯한 표정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깨달음은 늘 늦게 찾아오는 법. 이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신념처럼 지켜온 엄마가 내게 싸주었던 건 엄마의 자부심이었다. 국영수, 예체능 학원을 다 보내줄 순 없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도시락을 싸주는 것, 엄마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 비록 엄마의 자부심이 융통성 없는 내 성격과 만나 시너지를 낸 덕분에 나의 학창 시절이 조금 외롭긴 했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먹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는 내 DNA가 되었다. 누가 보면 먹는 것에 이토록 진심인 것이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재료를 살뜰히 살피고, 맞는 조리법을 선택하고, 가장 예쁜 그릇에 내어주는 것은 먹는 사람, 대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이다. 사랑하는 마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없이는 좀처럼 되지 않는 것. 엄마를 닮은 나는 오늘도 친구들을 초대하고, 시장을 보고, 찬장을 열어 어떤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받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환해질지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