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탈출> - 프랭크 다라본트 영화
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출연 |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제작 연도 | 1995 년
그러나 명작들 사이에서도 명작이라 불릴 만큼의 평가들은 작품을 거뜬히 뒷받침해 준다. 옥중 서사의 대표작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을 봤던 관객들은 무수히 많은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이 같은 옥중일기 스토리에는 하나의 흠집이 있기 마련이다. 인물들이 범죄자라는 점인데, 우리 현실에서는 쉽사리 동조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생기지 않는 집단이다. 그런데 그들도 하나둘씩 모이면 점잖은 시선을 보내게 되고픈 사연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저런 인간들을 두고 적잖이 고운 감정이 마음속에 기어 올라와도 되는가 싶은 남모르는 죄스러움이 결린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묘미는 그런 와중에 얕지 않은 가르침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는 데에 있다. 나쁜 인간들이 내뱉는 언행으로부터 적잖이 거리를 두면서도, 시나브로 내 이야기에 충고가 되고 마는 그 지점. 한탄과 후회, 잔인함과 고통에 더욱 서슴없이 다가가는 스토리라인에 관객들은 스스로를 몰입시켜볼 줄 알 테다. 다행히 우리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누명이 씌워져 수감된 터라 흔한 죄수들과는 행실이 다르겠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자기 탓할 때는 괜스레 같이 서러워진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죄책감을 벗겨내고 감옥을 탈출할 때가 되면 서러움은 인생의 가능성을 향한 기대감으로 변화한다.
명작은 그 변화를 깨닫는 데에서 나타난다.
변호사다운 논리적인 설득력, 절제 있는 언행, 그리고 민법, 조세, 시사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까지 그는 모르는 게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의 치명적 단점이자 현실인 ‘종신형’은 잘난 그의 면모를 부각하며 되려 깎아내리는 무거운 주체가 된다. 하지만 ‘종신형’은 ‘쇼생크 탈출’이라는 제목의 당위성을 불어넣는 수단뿐일 수도 있다. 앤디는 나갈 수 없는 처지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있게 한 시스템을 직접 움직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길들여지지(institutionalized) 않는 법을 서서히 일깨워나가기 시작한다.
Believe what you want.
These walls are funny. First you hate 'em, then you get used to 'em.
After long enough, you get so you depend on.
That's "institutionalized."
좋은 대로 생각해.
하지만 잘 알아둬. 이 철책은 웃기지. 처음엔 싫지만 차츰 익숙해지지.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벗어날 수 없어.
그게 "길들여진다"는 거야.
그는 다소 무모하다. 황소 같은 해들리 교도관 앞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동생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 해들리 교도관은 막대한 세금 납부 사실에 신경이 곤두서있다. ‘그게 뭐가 문젠가.’ 앤디는 부부가 서로에게 돈을 상속하면 세금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귀띔해 주고는 열심히 일한 죄수들을 위해 맥주병들을 대가로 요구한다. 어디 한낱 교도관에게뿐일까. 쇼생크 감옥의 도서 구입비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주 의회에 매주 한 통씩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결국 6년 동안 편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의회에서 비용을 마련해 주게 된 건 통쾌한 시놉시스의 한 부분이다.
또한 그는 무섭다. 교도소장 노튼의 불법 돈세탁 일까지 도맡게 되는데, 노튼의 자산을 숨겨 주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쇼생크를 탈출할 자신에게 마련해 둘 자금원을 만들어 낸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노튼 소장은 비겁한 건지, 기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 권총 자살을 하기까지 이른다. 여러모로 앤디와 관련해서 재미난 사실은, 죄수답지 않은 일을 스스로 발굴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곳도 있지만, 탈출을 노린 소행들이란 걸 생각해 보면 아주 꼼꼼하고 무서운 계획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를 감상하면, 앤디 듀프레인이 일궈낸 업적들 하나하나에는 숨겨진 명분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단순한 논리인 ‘희망’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내레이션 역할이자 앤디의 동료인 레드라는 인물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도리어 앤디와 가장 강하게 충돌한다. 아무것도 없는 독방에서 지낼 때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앤디의 이야기에 레드가 묻는다.
Oh, they let you tote that record player down there, huh? I could'a swore they confiscated that stuff.
독방에 축음기를 갖고 들어갔단 말이야?
The music was here... and here. That's the one thing they can't confiscate, not ever.
That's the beauty of it. Haven't you ever felt that way about music, Red?
(머리를 가리키며 ) 이 안에 음악이 있었어.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도.
그래서 음악이 아름다운 거야. 그건 빼앗아 갈 수 없거든.
음악에 대해서 그렇게 안 느껴봤어?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은 빼앗길 수 없고, 교도관들마저 빼앗아 갈 수 없는 것. 앤디 듀프레인은 그 자리에서 ‘희망’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가 줄곧 옥중에서 벌여온 일들이 어떤 ‘희망’을 걸고서 나타난 결과물이란 점을 자인한 것이었고, 레드는 그 말을 못마땅해한다. 이곳에서는 결국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곳 감옥에서는 ‘길들여짐’ 없이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레드는 자신의 진지한 생각을 말해 준다. 그도 그럴 것이, 50년을 복역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난 브룩스가 결국 바깥 삶에 적응하지 못해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브룩스라는 죄수는 쇼생크 내에서 도서관 사서로 오래 역할했던 노인이었다. 오랜 시간 변화해 온 바깥 문명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못해 부적응할 수밖에 없던 처지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여생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영화 프레임은 그런 단적인 예로 희망을 거부하는 듯하다. 브룩스뿐만일까. 레드는 브룩스가 자살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감옥 바깥의 삶을 그리지 못했을 테다. 이에 다짜고짜 희망을 꺼내는 앤디의 모습이 지금까지 알던 똑똑함과는 사뭇 달라 보여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감옥살이에 붙잡혀 있을 때, 그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되려 이야기한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자신을 종신형으로 구속한 시스템에 저항하고 계속해서 탈출의 당위성을 쌓아 간다. 앞서 말했듯, 무언가의 가능성이 보일 시점들이 모여서 명작이란 타이틀을 받쳐 줄 여러 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앤디는 특히 그 가능성을 주변 동료들에게서 찾아 주곤 한다. 토미라는 젊은 나이의 절도범에게 알파벳 공부부터 검정고시 시험 합격까지 커다란 학문적 성공을 안겨다 주는 건 군계일학의 한 시퀀스다. 영화 속에서 토미는 앤디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아무것도 없는 처음 상태에서 독기를 품고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려 하는 모습은 앤디와 토미 모두 공통된 성향이다. 그러나 교도소장 노튼을 중심으로 한 매정한 권력 앞에 무너지는 것 또한 같다는 점은 잔인하기도 하다. 앤디가 무고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 토미를 교도소장이 꾀어내어 죽여버리고 만다. 쇼생크 감옥이 조금씩 나아지려는 모습조차 사적 이익을 부당히 갈취하려는 교도소 시스템으로부터 제동이 걸리면서 앤디에게는 점점 더 험난한 감시가 주어진다.
사실 이후 앤디는 쇼생크 탈출에 금방 성공한다. 점점 그에게 옥죄어오는 압박감은 그를 더욱 단련시킨 것일 테다. 노튼 소장의 검은 돈 실체를 밝혀내는 편지를 쓰고, 본인이 쓸 검은 돈의 장부를 챙기고, 수년간 파온 벽 구멍을 따라 깊은 밤 탈출을 시도한다. 구정물 범벅이지만, 탈출은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영화의 가능성 지점은 오히려 남아있는 레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희망이란 관념을 두고 앤디와 충돌했던 그에게도 결국 희망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4번째 가석방 심사를 받는 자리에서 레드는 체념한다. 지난 때처럼 가석방 적격 미달 처리를 빨리 내려주고 쉬게 해 달란다. 40년 전의 철부지 자신에게 쓰디쓴 잔소리를 해주고 싶은 생각을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냐는 말에서는, 이제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심사자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겠냐’ 싶은 어르신의 자조가 섞여있다. 체념과 후회의 굴레에 둘러앉은 40년 세월의 흔적이 레드의 주름에 스며들어있음을 심사자들은 조용히 관찰한다.
레드는 가석방 기회를 부여받는다. 환한 미소로 감옥을 떠나고 나서야 그는 지난번 자살했던 브룩스를 떠올린다. 브룩스처럼 레드 또한 마트에서 포장 작업 일손을 돕는데, 일 도중에 굳이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냐는 허락을 구하는 대목은 어딘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다. ‘지난 40년 간 허락받지 않고 화장실을 간 적이 없었다’고 되뇌는 내레이션에는 길들여져 버린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불안함이 깃든다. 브룩스처럼 변화된 사회상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에 떨어야 하는가 싶은 그때, 레드는 앤디가 가져다준 가능성을 집어 올린다.
길들여짐 없이, 나를 변화시켜 줄 세상을 직접 만들어가는 도약기이다. 희망을 거부한 레드조차 이젠 멕시코 지후아타네호 연안에서 동료 앤디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변화의 무결성은 앤디라는 캐릭터로부터 시작해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다다라 담백하고 안정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쇼생크의 공간은 무척 열악한 곳이다. 살아가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겨두고 물리적인 폭력을 허용한다. 값진 일이란 하루를 또 버텨내고 익숙해져 가는 일이다. 공간적, 사회적 한계를 정해둔 이곳 쇼생크는 실제 내가 머무르는 공간을 밀접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조직과 어느 사회에 익숙해져서, 또는 길들여져서 보지 못하고 있는 테두리 바깥의 것들. 그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설렘이 이 훌륭한 작품 저변을 이루는 감정이겠다. 앤디를 바라보며, 레드의 가치 충돌과 변화를 소화하며 소중한 감상을 끝낸다. 부지런히 죽기보다, 부지런히 살아가야 함을 짊어지고서.
You're right. It's down there, and I'm in here. I guess it comes down to a simple choice, really.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
네, 맞아요. 그런 거죠. 가려는 곳은 저긴데 난 여기 있다는 거. 간단한 선택에 달린 것 같아요, 정말로.
부지런히 사느냐, 부지런히 죽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