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주환 Jan 31. 2022

[뷰티 인사이드] 14. 나무의 길

<뷰티 인사이드> - 백종열 영화


감독 | 백종열

출연 | 한효주, 박서준, 유연석, 이진욱, 김주혁, 천우희, 이동휘

제작 연도 | 2015 년


내 모습이 없어지는 건 어떨까요.

매일같이 거울을 보면서 익숙해져 버린 내 얼굴. 오늘은 어디가 좀 늙었나 싶어 자주 뜯어보는 내 얼굴. 하루하루 똑같은 그 얼굴은 그래서 친숙한 나의 모습이죠. 그런데 그런 익숙함을 바라게 될 수 없다면 어떨까요. 내 모습이 매일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내일의 나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루는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하루는 키 작은 아이였다가, 또 어느 날은 외국인이 됩니다. 내 얼굴이 매일 달라지면 어떨까 하는 어렵지 않은 상상에서 출발한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이러한 판타지적 설정을 그대로 들여오고자 합니다. 소잿거리는 충분하고 또한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바뀐 내 얼굴을 상상하곤 하죠. 다만 이 영화는 진부할 것만 같은 이 설정을 받아들이면서, 본질에 관한 남다른 중후한 사색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영화는 ‘김우진’이라는 인물을 필두로 전개됩니다. 앞서 말한 ‘매일 모습이 달라지는’ 운명에 처한 남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그는 중년의 한 남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시작은 저주였습니다. 남들과 다른 일상, 아니 숨어 다니기 바쁜 고통의 연속이었지요. 모습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안경과 렌즈, 사이즈별로 마련한 옷가지와 신발 등,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숨겨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였죠. 그는 쉽게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하루만 지나면 모두가 알 수가 없게 될 테니까요. 녹록지 않은 그의 삶 언저리에서 우진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나무를 닮아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는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영화에서 ‘나무’는 존재적 의미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문제작 가구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우진’과, 그의 삶에 불현듯 나타난 영업 파트장 ‘이수’ 두 사람 모두 가구업자들인 만큼, 영화는 나무의 소재를 프레임 속으로 최대한 가까이 두고자 합니다. 덕분에 관객들은 고요한 원목의 향기를 매 순간 곁에 두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를 둘러싼 ‘나무’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아직 우진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이수는 그에게 나무의 본디를 설명합니다.


이 의자는 사용된 목재가 좀 특별해요. 오래되거나 버려진 선박으로 만들어졌거든요.
참 신기하죠. 나무였다가, 배였다가, 이젠 또 이렇게 의자였다가...


선박과 의자의 형상을 지나는 동안에도 나무는 여전히 나무입니다. 이수는 나무의 처음 그 성질과 영혼을 이해하는 듯이 가구를 어루만집니다. 우진이 매일 모습이 바뀐다는 사실을 모르기 전부터 이수가 무언가의 본디를 섬세히 찾을 수 있는 사람임을 영화는 조심스레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수 덕분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즐비하게 놓인 가구뿐만 아니라 가구 이전의 나무로서의 됨됨이를 느껴보려고 할 텝니다.


이수를 만난 우진은 이제 나무의 의미를 자신에게 빗대어 봅니다. 오히려 이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맞겠습니다. 이수를 만난 이후의 변화니까요. 겉모습이 아닌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면의 진실로도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죠. 변함없는 나무의 본질처럼 말입니다. 모습이 매일 달라지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누군가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진 스스로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보는 기회가 됩니다. 물론 자신이 먼저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없는 이수에게는 정신적인 혼란과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주는 처절한 긴장감입니다. 하지만 결국 둘은 서로에게 기적이 됩니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나를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모습이 매일 바뀌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 나무의 존재적 의미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그렇게 조용히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만났던 여자와 내일도, 다음 주에도 만날 수 있다는 거.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이지만, 내게는 기적 같은 일.




그녀에게만 맞는 의자를 만들기도 합니다.

오로지 딱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의자. 앞서 우진이 나무와 닮아있다고 말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의자 같은 나무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한 층 더 다듬어진 상상을 해봅니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자신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이수에게 우진은 이별을 고하고 맙니다. 시간이 지나서 이수는 그가 만들어 준 의자를 보곤 그와 같은 사람이 또 없다는 걸 다시금 느낍니다.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그이지만, 자신에겐 한없이 같은 사람이었음을. 변함없는 사랑을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었음을 말이죠. 머나먼 타국에서 그들이 재회할 수 있던 건 또 한 번 나무가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만큼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나무와 밀접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며 미동도 없이 꿋꿋하게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 초록빛 세계의 탄탄함을 경외롭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우뚝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굳은 결심, 중후한 고집을 바라봅니다. 영화는 그런 변함없는 나무의 특성을 미약하고 걱정 많은 한 사람, 우진에게 그대로 대입합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저주를 기회로 바꾸는 용기를 준 셈입니다. 기적을 만들고, 기적을 다듬고, 그리고 사랑의 진면모를 더욱 느낄 수 있는 가치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뷰티 인사이드>가 해피엔딩이라서 참 마음이 놓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던 우진이 그런 일로 속상해할 일이 없어진 것만 같았죠. 또 좋은 사람이 영원히 옆에 있어 줄 테니까요.


난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어.
이렇게 매일 다른 모습이어도 괜찮아.
다 같은 너니까.
난 네 안의 김우진을 사랑하는 거니까.
미안해, 오래 걸려서.



매일 바뀌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많은 인원의 배우들을 캐스팅해야만 했습니다. 다양한 배우들을 아름다운 작품에 한데 초대했으니 팬들과 배우 모두에게 사실은 괜찮은 득이려나요. 장면마다 달라지는 배우의 얼굴을 감상하는 것도 작품의 흥미로운 포인트입니다. 우진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무려 123 명이라고 합니다. 몇 초 단위의 컷 하나에만 담기는 우진들도 많이 있었죠. 국적을 가리지 않는 남녀노소 모두가 우진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여전히 같은 사람임을 받아들이는 건 사실 이수만의 역할은 아닙니다. 우진을 담는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 또한 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진이 우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순간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평범한 사람을 매 순간 그대로 인식하듯이 우진을 담는 시선은 무척 자연스러웠습니다. ‘저 사람이 우진이구나’ 하고 한 박자 쉬면서 이해하는 시간조차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린 그저 온전히 우진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주변 사람의 겉모습이 조금 달라지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식습관이나 수술로 외모에 큰 변화가 생기고는 하지요. 그때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다시 처음부터 받아들이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알던 그 사람이기에 거리낌 없이 편하게 대합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아는 데에는 겉보다는 내면이 무척 중요하단 걸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지내왔습니다. <뷰티 인사이드>는 관객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는 것보단 한편으론 잊고 있었던 당연한 사실을 상기해 주려던 좋은 심보로 가득 찬 영화겠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뷰티 인사이드] 13. 동화, 뒤집어 읽어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