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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Sep 19. 2022

[바다] 17. 죄와 구원

<라이트하우스> - 로버트 에거스 영화

수평선 너머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때마다 거대한 몸집 앞에 선 미물처럼 겸허해지는 순간이 오곤 합니다. 단념해야 할 것과 스스로 북돋워 줄 필요가 있는 것들을 얌전히 정리하기도, 어느 때는 수평선을 훑는 눈동자의 미세한 움직임만 허용한 채 생각과 의식을 잠시 가로막기도 합니다. 고요한 철학을 들려주는 듯한 바다는 한없이 포용적이지만 폭풍전야의 기다림 속엔 고성을 한가득 머금고 있어 보입니다. 언제라도 나를 매질할 수 있는 존경스러운 스승님 앞에 선 친밀함과 같기도 합니다.

거대한 바다 앞에 선 미물로서의 인간상을 다룬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브런치 피드를 처음 구성할 때 이미 ‘바다’라는 키워드를 다룬 바가 있습니다. 많은 작품에서 바다의 소재가 드넓게 사용되는 만큼 또다시 거룩한 이야기를 모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더랍니다. 인물들에겐 항상 미지의 존재를 탐험할 욕구들이 쌓여있거니와 두려움을 아직 모르는 오만함이 동시에 배어 있기도 합니다. 고집스러운 인간에게 바다가 끊임없이 고함과 경계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이 작은 오만함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소심한 제 자신을 대신해 바다 한가운데를 유영할 것을 선택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접하고, 그들이 세워놓은 자만심 속에서 쓰러질 때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순간 바다가 주는 위대한 교훈적 자산들의 가치가 한껏 풍요로워집니다. 바다에 대한 작품을 읽고 기록하고 싶은 이유는 그렇게 성찰의 기회를 얻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 피드에서 다룬 글보다 조금 더 무거운 플롯을 지닌 작품들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바다] 감상문 리스트
# <라이트하우스> - 로버트 에거스 영화
# <모비딕> - 허먼 멜빌 소설
#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감독 | 로버트 에거스

출연 | 로버트 패틴슨, 윌렘 데포

제작 연도 | 2019 년


죄를 마음껏 짓고 살아도, 모두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성경의 내용을 잠시 빌리자면, 예수는 그 시대상의 모든 죄, 후세 인간들이 벌일 죄까지 사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피의 희생을 자처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짊어지는 그때, 세상의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두 사해지고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위대한 종교적 가르침을 근거로 지금껏 일어났던 수많은 범죄들에 면죄부를 적용하고자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결코 없을 텝니다. 신이 사하여 준 죄라 할지라도 땅 위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법리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죄는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상처로 남아있으니까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8절)



위 마태복음 구절에서도 보다시피, 우리의 죄는 하늘의 신께서 해결해 주기 이전에 우리 땅에서도 풀어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구원을 받기 위해 열심히 고해성사에 참여하고 회개를 일궈내고자 한다면, 그 일에는 피해를 입은 다른 이들에게 용서를 구할 진실한 행동까지를 포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상의 어두운 면모를 관조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능숙한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2019년 작 <라이트하우스 The Lighthouse>에서는 이러한 죄와 구원의 의미를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한 명의 인물을 이야기합니다.




영화 <라이트하우스>는 그 제목처럼 ‘등대’ 또는 그 등대섬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공간적 특징입니다.

주인공은 각각 로버트 패틴슨, 윌렘 데포가 연기한 등대지기 2명입니다. 서사는 이 두 주인공만을 중심으로만 전개가 되며, 사방은 온통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등대 사이렌 소리뿐입니다. 앞으로 4주 간 등대를 지켜야 할 두 명의 주인공에겐 서로 이외에는 믿고 의지할 그 누구도 없어 보입니다. 첫날을 무사히 지낸 윌렘 데포 역의 선임 등대지기 토머스 웨이크가 후배 에프라임 윈슬로우에게 건배사를 건넵니다.


Should pale death with treble dread make the ocean caves our bed,
God who hear’st the surges roll, deign to save the suppliant soul.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를 해저에 묻으려 한다면
하나님이 해일을 들으시고 간절한 우리의 영혼을 구해주시길.


구원을 소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영화 초, 중, 후반부에서 이 토머스 웨이크라는 등대지기가 해당 기도문을 다시금 상기해 줍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내용을 곱씹기 이전에 중간중간 ‘등대’라는 공간적 소재로 주의를 돌려주는 대사 장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등대의 오랜 역할은 멀리서부터 육지로 돌아와야 할 해상 선원들에게 방향 신호를 알려주어 무사귀환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선 이미 ‘구원’ 또는 ‘희망’의 상징으로서 등대와 그 불빛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선 등대의 빛으로 구원할 대상은 멀리 바다 위의 선박들이나 선원들로 나타나진 않아 보입니다. 시종일관 영화의 프레임에는 배와 선원의 형체는 일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두 주인공뿐입니다. 등대의 빛에 도달하려는 자와, 그를 만류하는 자, 즉 이 두 명의 등대지기는 계속해서 이 불빛에 집착을 하게 되는 일종의 자리싸움을 보여 줍니다. 토머스 웨이크는 신입에겐 위험한 일이라며 에프라임을 빛이 있는 등대 상부층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둘 사이의 묘한 대립감으로 말미암아 등대는 구원이 아닌 집착과 욕망의 대상 그 자체로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에프라임 윈슬로우는 빛의 구원이 있을 등대의 탑에 올라서고 싶어한다.


영화 내내 에프라임은 등대 빛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는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에프라임은 어떠한 죄를 진 상태였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덜고자 했던 이유입니다. 에프라임은 은연중에 토머스에게 진실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실 에프라임 윈슬로우가 아닌 토머스 하워드이며 캐나다 북부 산림 일터에서 동료인 에프라임 윈슬로우를 살해했다고 말이죠. 지금껏 자신이 죽인 옛 동료의 이름으로 지내고 있던 것입니다. 이 등대지기의 고백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등대섬을 둘러싼 해풍이 강해질수록 영화 속 등대의 불빛은 구원으로서의 의미와 멀어지게 됩니다. 구원을 쉽게 갈망하려는 이기적인 인간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지요.


침착하고 숫기 없을 줄만 알았던 등대지기 에프라임의 첫 모습과 달리 영화 중반부를 지나면 가혹한 진실을 쉽게 내다 버리려는 겁쟁이 살인자로서 운명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합니다. 그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 주는 역할은 사실 선임 등대지기 토머스 웨이크의 몫입니다. 처음에 토머스 웨이크가 들려주는 예전 등대지기 일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 에프라임, 아니 토머스 하워드의 자아 분열증을 언급하는 듯합니다.


Why’d yer last keeper leave?
이전 등대지기는 왜 떠났나요?

Him? My second? Died.
Aye, went mad, he did. First a strangeness. A quietude.
Then wild fancies struck him. Ravin’ ‘bout sirens, merrolk, bad omens and the like.
In the end, no more sense left in him than a hen’s tooth.
He believed there were some enchantment in the light.
He notioned St. Elmo did cast his very fire into it. Salvation, said he.
두 번째 녀석 말이야? 죽었어.
미쳐버렸지.
사이렌이나 인어 불길한 징조 따위를 말했지.
결국에는, 완전히 머리가 돌아버렸어.
빛 속에 어떤 마법이 있다고 믿었지.
성 엘모가 직접 불을 붙였다고 생각했지. 구원이라고.


실제 토머스 하워드가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또한 인어 모형상을 부적처럼 꼭 옷에 지니고 있다거나 결국 인어 환상까지 경험하게 되는 하워드의 망가진 모습은 토머스 웨이크가 말한 등대지기 일화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빛과 구원에 닿으려는, 믿음으로부터 기원한 일체의 행동들까지 말이죠.


더욱이 둘의 이름이 ‘토머스’로 같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사실상 선임 토머스 웨이크는 후임 토머스 하워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 또는 자신의 양심을 형상화한 가상의 인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워드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난 과오 얘기를 끄집어내게 하고 있다면서 웨이크를 질책하기도 합니다. 하워드는 계속해서 자신을 고백시킴으로써 죄책감을 들게 하려는 양심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죠. 영화는 두 사람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잔인한 고해성사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을 적막히 드러냅니다.


Tom, don’t be working to twist words out of my head.
토머스, 내 머릿속에서 얘기 좀 끄집어내지 마요.




토머스 하워드는 결국 빛에 닿습니다.

들고 다니던 부적의 인어상을 두 동강 내고, 토머스 웨이크, 즉 양심까지 제거한 뒤죠. 그러나 빛은 그의 두 눈에 광열을 번쩍이게 하면서 찬란한 구원이 아닌 찢어지는 듯한 비명의 소리를 선사합니다. 토머스 하워드가 내지르는 비명은 영화 초반부부터 일정한 주기를 가집니다. 유리그릇이 서로를 비벼 마찰 내는 듯한 비명소리는 그 높이가 점점 커집니다.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이 최후의 단말마는 그가 추구했던 구원의 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간파해 주는 듯합니다. 토머스 하워드 자신도 알았을 테지만, 그는 계속해서 양심에 덤비고, 스스로도 마지못한 비명들을 내지르면서 등대지기 생활을 견뎌왔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죄책감과 고통이 한데 얽혀있는 소리에, 빛의 이미지는 더 이상 아름다운 구원의 모습이 아닌 채찍질을 휘두르는 유령이 되어 버립니다.


신의 노함을 시청각적으로 독특하고 명석하게 표현해 낸 결말입니다. 끝내 다다랐던 등대빛은 뜨거움 그 자체였으며,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비명 소리가 가득해집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경에서는 분명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고 인간은 구원되었다고 읊습니다. 다만, 감독은 절대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소인들을 향해 성경의 구절을 과감히 뒤덮으라 직언합니다. 일말의 구원조차 허락하지 않는 등대섬의 세계를 그려내면서 날카로운 느낌표를 찍습니다.


바다갈매기의 먹이가 된 토머스 하워드의 말로가 마지막 장면으로 선택된 건, 그러한 엄중한 메시지에 방점을 크게 두는 것입니다. 바다갈매기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담은 보호의 대상이자 대자연의 규율이기 때문에 함부로 때릴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갈매기를 해치지 말라던 경고에도, 하워드는 몹쓸 행동을 보이고야 맙니다. 그렇게 인과응보를 당하는 하워드는 모든 창자와 피를 갈매기들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더러운 죄의 한 점 찌꺼기까지 모두 없애겠다는 자연과 절대자의 의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 속 바다갈매기엔 죽은 자의 영혼이 깃들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의 영역은 한없이 작습니다. 매서운 파도와 어두컴컴한 공포로 둘러싸인 등대섬의 공간은 인간의 동선을 좁게 한정시키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수평선 한가운데에 인간을 가둬 둡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히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할 때, 토머스 하워드는 되려 인어와 갈매기, 신의 속삭임인 양심까지 허물어 버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저 빛에만 닿으면 된다는 안일한 태도에 갈 곳 없는 자신의 위치를 금세 잊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작아질 뿐입니다.


등대빛이 퍼지고 있지만, 사람이 최종적으로 올라서야 할 넓은 육지의 공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살인을 묵인한 자에게 그 어디에도 돌아갈 곳 없는 섬에 거짓 희망으로 그를 불러들이려 한 신의 심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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