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켈빈 웨버의 일상엔 두 가지의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나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감.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가족을 지켜야겠다는 사명감. 켈빈 웨버는 1962년을 살아가는 미국 시민이자 임신한 아내를 둔 가장이다. 그해 10월, 미국 정찰기가 쿠바 영토에 탄도미사일 기지가 배치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케네디 대통령은 핵전쟁의 위험을 공표한다. 켈빈은 두 가지 생각이 극도로 치달으면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방공호.'
때마침 켈빈의 집이 폭격을 당하면서 큰 폭발(blast)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려한 핵전쟁이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다. 켈빈은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지하 방공호로 내려간다. 웨버 부부는 핵먼지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의 35년이란 시간을 스톱워치에 설정해 둔다.
유쾌한 창세기풍 로맨스
영화의 콘셉트는 '코믹'이다. 냉전 시대 동안 핵전쟁이 발발한 적은 단연코 없다. 집에 떨어진 폭격은 사실 공산주의 국가의 공격이 아니라 항공기 기계 결함으로 추락사고가 일어나면서 발생했던 것이 원인이다. 웨버 부부는 35년 간 누구라도 겪어보지 못할 '오해'를 하고 있었을 뿐. 더욱 의미 있게 보아야 할 영화적 허용은 그들 부부 사이에 아들 '아담 웨버'가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들어갈 땐 둘이고, 나올 때는 셋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대담하고 획기적인 코믹 설정이다.
영화는 35살의 어른으로 성장한 '아담 웨버'의 시선에서 담론을 출발한다. 아담은 세상의 이치와 지식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 켈빈의 홈스쿨링 덕분에 역사, 지리, 외국어, 댄스의 영역까지 섭렵한 아담에겐 지적 충만은 벌써 이루어진 셈. 그만큼 그의 눈동자가 담지 못한 세상이 거대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35년의 스톱워치가 종료되고 지하 방공호의 뚜껑이 열리면서 그의 눈도 함께 번뜩인다.
아담이 가장 바랐던 건 에로스적 사랑이다. 그가 가족을 대신해서 방공호를 나올 때 단 하나의 목표 '결혼할 여자를 찾는 것'이 전부일만큼 가장 궁금해하고 동경하던 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영화는 긴 세월 문명을 추체험하지 못한 인물의 시선을 이성 찾기에만 둠으로써 로맨틱코미디의 장르적 경계선을 분명히 긋는다. 인물의 이름만 보아도 '아담'과 '이브'다. 작중 '이브'는 아담이 바깥 세계에서 운명의 상대로 찾아내는 여성 캐릭터다. 야구 카드 수집가에게서 창세기 모티브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듯이 영화는 인류가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시작점을 차용한다. 아담의 여정은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귀결되며, 그의 동선에는 항상 이브가 함께한다.
이브는 속세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아담에게 조력자의 역할을 제공한다. 얼핏 사랑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이 위태로운 순간들이 몇 있었으나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다. 아담에게 이해하지 못할 시스템이란 난관이 아니라 유머로 승화하기에도 충분한 서사적 징검다리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일관되게 유쾌하다. 때문에 사랑하고 싶은 아내를 찾기 위해 떠난다는 설정은 억지스럽다기보다 아담에게는 다분히 현실적인 일이겠거니 수긍할 수 있는 허용의 범위를 넓혀둔다. 이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끌리기라도 한 듯 멀어지고 다시 돌아올 때는 관객은 그것을 명명백백한 잘못이 아닌 '세상 눈치 없는 놈'으로 치부하고 흔쾌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상처 입은 이브에게 좀 더 견뎌내라는 듯 영화는 계속해서 눈치를 배워가는 아담의 총총걸음만을 뒤쫓는다.
새로운 관점을 직시하는 콘트라스트
I get it! I finally get it! You have to see it to understand it! Because you must! 이해했어요!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네요! 그래야 하니까!
세상의 이치와 눈치를 알아가는 아담에게 깨달음이란 일련의 꼭 필요한 의식(ritual) 행위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론서와 아버지의 홈스쿨링이 아닌 직접 체험하는 실전적 행위로 전환된다. 작중에서 아담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진다. 수많은 감각이 서로 밀착된 수행길을 걸어 다니는 것이다. 상대편 투수의 기막힌 수비로 홈그라운드 군중들이 실망할 때 아담은 오히려 기쁨을 터뜨린다. 어려서부터 투수의 역할조차 이해하지 못한 그에게 시각적으로 매우 유용한 체험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독특하고 독창적인 진면모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는 세상을 낙관하며 배움의 즐거움을 영위한다. 방공호에서 살아온 덕에 오히려 세상에 더욱 가까워지는 인물로서 이미 현실에 지칠 대로 적응한 관객에게까지 새로움이란 가치를 직시하게 한다. 관객은 오두방정에 가까운 그의 행동패턴을 읽고 그로부터 변화된 스크린을 바라볼 줄 알게 된다. 카메라는 기존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철저히 아담의 시선으로 채색된 결과물로써 세계를 그려낸다. 바다를 보되 아득히 넓음을 바라보게 하고, 하늘을 보되 무한히 높음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무작정 그 시선을 따라가라고 종용하진 않는다.)
사실 아담이 방공호에서 나오기 전 아버지 켈빈이 먼저 바깥에 나오게 되는데, 세상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유흥가 밤길이 전부인 흉물처럼 묘사된다. 사람들 표정엔 취기가 어려있고 형형색색의 옷차림새와 메이크업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트랜스젠더는 방사능에 노출된 자웅동체 돌연변이라고까지 일컬으며 35년이 지난 세상에 관해 염세를 토한다.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아담에게 위험이 도사리는 바깥을 조심하기를 당부한다.
그러나 아담이 처음 마주하는 세상은 환하게 비친다. 아무도 취기에 서려있지 않다.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눈인사를 받는다. 평온하고 안락한 낮 시간이 반듯하게 조명된다. 아무래도 영화는 아담에게 자연스러운 해방감을 주기 위해 깨끗한 무대를 마련해 준 것만 같다. 아담의 눈으로 세상과 조우한 시점부터 영화는 이전까지 묘사된 고립감과 어두움을 물리치고 채도와 명도를 올리길 작정한다. 공포에 떠는 밤의 이야기가 아닌 청사진이 저절로 그려질 것만 같은 화창한 낮의 이야기. 아무것도 모르는 아담에게 이것이 진짜 현실이자 진실된 모습이라는 듯 설득하려는 영화의 콘트라스트는 명확하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을 모티브로 내세우고 있지만 같은 인물에 메시아적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방공호 바로 위에서 근 35년 간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웨버 식구들을 신격 존재로 인지하고 하염없이 기도를 올리게 된다. 아담 웨버를 전능하신 주님으로 아담의 엄마인 헬렌 웨버를 마리아 성모로 오인하면서 여러 코믹한 상황이 드문드문 연출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자리에 관객을 함께 앉혀놓겠다는 듯이 신격화된 주인공들을 올려다보는 로우앵글숏을 택한다. 특별히 그 숏들로만 영화를 속단할 순 없지만 현실에 만연한 고립과 한계를 극복할 해결자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아담을 바라보게 할 자리를 만들어준 점이 괜스레 상냥하다. 밝고 평안한 세상 속에서 사사건건 부딪히는 아담의 시선이 진정 현실의 아픔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점까지 끌어올리길 영화는 계속해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