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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Oct 14. 2021

[음악과 추억하는 법] 4. 기억하는 힘

<서칭 포 슈가맨> - 말릭 벤젤룰 영화

 쇼팽의 녹턴 20(Nocturne No. 20, Op. posth.)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Andante Spianato and Grand Polonaise Brillante Op. 22)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각각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곡이다. 한창 소나타를 배우던 어린 시절, 나는  영화를 처음 접했고 쇼팽의 음악과도 처음 마주했다. 곡명은 몰랐지만  쇼팽의 멜로디는 영화에 대한 깊은 감명과 함께  머릿속에 각별히 남아있게 되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손가락뿐만 아니라, 가족과 영화를 보던  시절 빌라 주택의 깨끔한 거실 공간, 거실  어렴풋이 흩어지는 저녁 색채마저 쇼팽의 음악을 설명할  있게 되었다. 나의 쇼팽은 그렇게 시작한다.

음악을 들을 때면, 멜로디와 가사 자체에 심취하기도 하지만, 음악과 관련한  기억을 잠시 끄집어낼  또한 적지 않다. 어쩌면  많은 경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노래를 처음 경험했던 때의 이야기와 세상들이  구석구석 어딘가에  노래와 함께 머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노래가 들릴 때면, 숨어있던  추억들이 기지개를 펴고 나온다. 다시 나와 마주하고  감정을 들뜨게 한다. 또다시 나는 음악을 사랑하게 된다.

음악을 말미암아  기억들을 반추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때 나누었던 춤사위로 다시금 웃어 보기도, 그때 이별했던 사람의 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아마 누구나가 그럴 것이다. 특히 음악을 지탱하여 지나갔던 인연들을 그리워하는 모습들이 종종 영화와 문학 속에서 발견된다. 새드엔딩과 해피엔딩 사이의 구분은 잠시 내려놓아 보자. 음악과 마주하며 감정과 추억을 떠올리는 대목에선 그것이 슬픔의 것이든, 황홀함의 것이든, 감정에 멜로디가 입혀지는 느낌 자체에서 뜨거운 감상이 남는다. 청각적인 즐거움까지 입혀지는 음악이라는 요소는 다양한 작품들에서 적절한 수단이자  귀감이 되는데, 음악에 대한  단면을 ‘추억하기 골라 보는 이유다.

[음악과 추억하는 ] 감상문 리스트
#<서칭  슈가맨 Searching for Sugarman> -  말릭 벤젤룰 영화
#<송포유 Song for Marion > -  앤드류 윌리엄스 영화 
#<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Dans ce jardin qu’on aimait> - 파스칼 키냐르 희곡



감독 | 말릭 벤젤룰

제작연도 | 2012년


누군가를 기억하는 힘은 신비로웠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힘은 혼자만의 이야기를 많은 이들의 것으로 돌려주었으며, 멈춰있던 영혼의 발걸음을 다시금 재촉였다. 단지 그에 대한 기억들이 모였을 뿐인데도 경이로운 변화들을 움직이게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 Searching for Sugarman>에서 관객은 기억하는 힘과 이로 말미암은 움직임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30년 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70년대 미국 팝가수로 활동한 로드리게즈(Rodriguez)라는 인물이다.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출신의 로드리게즈는 로컬 펍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고즈넉한 기타 선율 위에 완곡하지만 날렵한 가사들을 담던 그였고, 인근 지역민들에게는 벌써 위안을 주고 있던 컨트리 가수였다. 곧 프로듀서들의 눈에 띄고 프로 앨범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그는 1970년 1집 <Cold Fact>, 이듬해엔 2집 <Coming from Reality>을 발매하며 명쾌한 가사들을 미국 사회에 들려주고자 했다. 그와 동료들은 수많은 팬들의 벅차오르는 심장과 고요한 생각을 그의 노래로 채우고 싶어 했다.


소망만이 거기까지였을까. 그의 앨범을 찾는 이는 거의 없었다. 1집 앨범의 판매고는 단 6장에 불과했으며, 2집 출시 한 달여만에 로드리게즈는 소속사 서섹스 레코즈로부터 계약해지를 통보받는다. 가수는 곧 사람들 앞에서조차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 그가 공연 중 분신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소식이 남아있는 팬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자취는 사라지고 있었을까.

미국 디트로이트로부터 13,000KM 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곳의 1970년은 참담했다. 인종차별주의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물려 많은 유색 인종들과 진보 성향의 백인들은 마음껏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내부의 반발과 외국으로부터의 간섭을 막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스포츠와 문화는 제한되었다. 국민들이 스스로 위축되기만을 바라는 부랑 국가의 전형이 그 시절의 남아공이었다. 그때, 그곳 험난한 쇠고랑 안에서 로드리게즈의 음악들이 움틀대고 있었다. 억압받는 시민들은 로드리게즈의 가사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들에게 꿈이 될만한 메시지들을 멜로디와 자간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로드리게즈의 노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50만~100만 장으로 추측되는 판매고를 거뜬히 내걸고 두 앨범은 남아공 사회에서 명반의 타이틀을 거미 쥐었다. 이윽고 그의 노래들이 검열 대상으로 지목되었음에도 공공연히 사람들의 귀에는 역정의 멜로디가 멈추지 않았다. 로드리게즈는 고향과는 거리가 먼 어느 곳에서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The mayor hides the crime rate

Council woman hesitates

Public gets irate but forget the vote date

시장은 범죄율을 숨기고

여성 의원은 주저앉네

사람들은 화가 나지만 투표 날짜는 잊어먹었어

This system's gonna fall soon, to an angry young tune

And that's a concrete cold fact

체제는 곧 무너져, 젊은 분노의 노래 앞에서

그건 냉혹한 사실이야

 

 - 로드리게즈의 노래 <The Establishment Blues> 중에서


다만, 남아공의 팬들은 본인들이 사랑하고 열망하는 로드리게즈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미 오래전 생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황홀한 노래 가운데 그들을 씁쓸하게 했다. 로드리게즈가 누구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몇 장 없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지, 왜 그 가사를 썼는지. 남아공의 음악평론가 크레이그 바톨로뮤라는 사람도 그중 하나였다. 여러 조사와 탐정 끝에 로드리게즈의 1집 앨범 공동제작자, 마이크 시어도어와 전화 연결을 하기에 이른다. 바톨로뮤는 남아공의 영웅인 로드리게즈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조심스럽게 묻고자 했다. 남아공의 시민들이 추앙하는 가수가 어떤 인물이고, 그들이 기억하는 영웅의 진면모는 어떠한지 끊임없이 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로드리게즈는 어떻게 죽었나요?” 마이크 시어도어가 몹시 놀라면서 대답했다.

“죽다니요? 아직 살아있어요.”




로드리게즈는 디트로이트에서 임금 노동자로 오랜 생활을 지내온다.

그에겐 남다른 끈기가 있어, 음악을 접고서라도 소박한 평범함을 즐기며 살아간다. 점차 음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시기, 거의 없는 앨범 중 하나를 누군가가 남아공에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직접 선물해 준다. 선물 받은 이는 담백한 통기타 장단에 정직한 가사를 담은 이 노래들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노래와 동행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난다. 경고만이 가득한 세상의 울타리에 오히려 감미로운 멜로디로 맞서는, 수많은 팬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품에는 묘한 반항심이 생겨 나고, 두려운 체제를 마주 보는 용기마저 배우게 된다. 음악은 멈춰있는 주인을 대신해 어두운 현실에 갇혀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로드리게즈 스스로도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이 있었고, 남아공의 팬들에게도 그의 얼굴은 찾을 수 없는 존재였다.


로드리게즈는 마침내 자신의 음악이 오랫동안 남아공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오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낳은 음악의 행방을, 자신이 찾은 것도 아니고 남아공 팬들의 절치부심이자 소망이 저력을 다한 결과였다. 로드리게즈의 노래로 큰 위로를 받은 이들은 추억이라는 대가를 오랫동안 남겨놓고 있었다. 작은 힘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노래에 대한 감사와 그 추억거리가 뭉쳐 로드리게즈에 다가가는 걸음 한 자국 한 자국을 만들어냈다. 로드리게즈의 죽음은 헛소문에 불과했으며, 자신을 찾는 팬들을 위해 남아공으로 올 것이라는 사실이 곧 퍼져나갔다.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가수와 팬이 하루빨리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힘은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If ever there is an air of intrigue and mystery around a pop artist, it is around the artist known as Rodriguez.
There's no air of intrigue and mystery around him anywhere else in the world,
because his two albums, Coming From Reality and Cold Fact, were monumental flops everywhere else.
There were no concrete cold facts about the artist known as Rodriguez.
Any musicologist detectives out there?

어떤 팝 가수의 삶이 영원한 수수께끼라면 그건 바로 로드리게즈일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그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그의 두 앨범 모두가 완전 실패작이었으니까.
로드리게즈에 관해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음악평론가 탐정 어디 없나?


‘영화는 죽은 가수의 발자취를 찾는 물음에서 시작하고, 살아있는 가수에게서 끝난다.’

아마 영화에서 이와 비슷한 문장으로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압축했지 싶다. 로드리게즈를 찾는 여정은 아름다운 기억을 고집하는 과정이다. 음악의 기억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들어 준 이의 역사를 찾아 나서는 여정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중고 음악상 스테판 시거맨과 음악평론가 크레이크 바톨로뮤는 그를 기억하고 기록했으며, 남아있는 흔적들을 잇대어 보았다. 가사 속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로드리게즈 음악의 수입원을 추적했다. 일련의 알찬 노력과 집착 덕분에, 남아공의 수많은 팬들은 결국 그들의 땅에서 로드리게즈를 직접 만나게 된다. 1998년 3월 8일 남아공 단독 콘서트를 열고 가수와 팬덤은 한 프레임 속으로 담길 수 있게 된다. 로드리게즈의 동작과 목소리는 그가 정말로 살아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준다. 그를 기다린 팬들은 너무나도 절실히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레코드판과 라디오에서만 들춰냈던 목소리가 현장의 것으로 들려오는 순간이다. 한편으로 죽어있던 가수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찬란한 공연이다.


다큐멘터리는 로드리게즈의 발자취를 거룩하게 뒤쫓는다. 그의 등장을 현란하게 앞세우지 않는다. 그의 가삿말이 완벽했던 이유와 1970년대의 남아공 정치적 현실을 통해 그의 음악의 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음악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며, 음악 자체로도 소중히 다룰 줄 알았던 시민들의 희망법을 먼저 담았고, 음악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 나서 로드리게즈의 실제 모습을 비춘다. 그의 피부에는 힘없는 빛이 닿는 듯했고, 헝클어진 긴 머리와 손주름은 일생의 고단함을 조심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를 담는 프레임에는 반가움과 편안함이 전부다. 다큐멘터리 시청자는 그의 인간적인 가치와 음악적인 명성을 앞서 전해 듣고 온 터. 그를 마주하는 그 순간은 어떤 불편한 기척도 없으며, 되려 세상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해진다. 그리고 로드리게즈와 그의 가족 인터뷰 한 땀 한 땀에는 소중한 가치들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 후반부는 그 점이 무척 괜찮았다.


But just because people are poor or have little doesn’t mean that, you know, their dreams aren’t big and their soul isn’t rich, you know,
and that’s where the classes and the prejudice come from is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you and me, and there’s a difference between them and us.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꿈이 크지 않거나 영혼이 풍요롭지 않은 건 아니에요.
계급과 편견이 시작되는 건 항상 너와 나,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해서죠.


로드리게즈의 대표곡 <Sugarman> 가사 속에서 슈가맨은 사람들이 의지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음유시인을 가리킨다. 로드리게즈는 사람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슈가맨이 되었고 말이다.


Sugar man, you are the answer

That makes my questions disappear

Sugar man, cause I’m weary of those double games I hear

나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바로 슈가맨 당신이야

슈가맨, 난 이런 치사한 세상에 신물이 나


Sugar man, won’t you hurry

Cause I’m tired of these scenes

For a blue coin, won’t you bring back all those colors to my dreams

어서 와 줘, 슈가맨

난 이 광경이 지긋지긋해

파란 동전을 줄 테니 헝형색색의 내 꿈을 되돌려 줘


 - 로드리게즈의 노래 <Sugarma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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