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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Oct 26. 2021

[음악과 추억하는 법] 5. 이어가기

<송포유 Song for Marion > - 폴 앤드류 윌리엄스 영화


감독 | 폴 앤드류 윌리엄스

출연 | 테렌스 스탬프, 젬마 아터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제작연도 | 2012 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가 어려울 때, 노래는 듬직한 구원자가 되어 준다.

누군가가 써놓은 가사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고, 아름다운 장조 멜로디가 에워싸면서 사과의 가삿말이 더욱 감미롭게 다가온다. 사과를 받는 이의 마음이 한껏 풀릴 때면 노래가 그렇게 훌륭한 힘이 되어 줄 수가 없다. 청승맞은 노래 없이도 사과를 직접 건네면 쉽게 풀릴 일이 아니냐는 쓴소리도 있을 테지만, 말로 직접 건네는 것도, 행동의 변화조차도 거부하는 주인공 아서에겐 직접적인 표현이란 매우 서투른 영역이다. 암 말기 환자인 아내 메리언과 함께 살아가는 아서가 묵직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노래를 부르는 이 영화의 제목은 <송포유>, 즉 ‘아내를 위한 노래’다. 아내에게서 무엇을 바라고자 노래했을까. 무엇을 반성하고자 가삿말을 읊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유유히 떠나보낼 적을 가까이하는 영화 <송포유>에서는,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꿈을 이어가고자 하는, 남은 이의 진솔함으로 사과의 가치를 전달한다.


If you happen to see the most beautiful girl that walked out on me

Tell her, "I'm sorry."

Tell her, "I need my baby."

Oh... Won't you tell her that I love her

혹시 날 두고 가버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를 보게 된다면

그녀에게 전해 주세요, “미안하다”라고.

그녀에게 전해 주세요, “당신이 정말 필요하다.”라고.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 Charlie Rich의 노래 <The Most Beautiful Girl> 중에서




메리언은 노인 합창교실에 드나드는 것을 좋아한다.

암 말기 환자의 몸이지만서도 이 노래 수업만큼은 절대 빼먹고 싶진 않다. 동년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인 공간에서 다 함께 화음을 넣고 음악을 만들어가는 일이란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그녀에겐 무척 고상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남편 아서는 무뚝뚝하고 고지식하기만 하다. 메리언이 아픈 몸을 이끌고 엉뚱한 신세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꼴은 면박을 주어 마땅하다. 하나뿐인 아들놈에게도 정 어린 대꾸는 없다. 가족에게 자랑스럽다는 말 한마디 못 건네주는 아버지이자 남편에겐 누구를 탓하고만 싶은 기색이 역력해 보일 뿐이다.


합창교실의 젊은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교외 합창대회를 준비한다. 어르신들을 데리고 성적 가사를 과감히 담은 헤비메탈과 이기주의를 고발하는 힙합 장르의 무대를 꾸민다. 그에 장단 맞추는 어르신들도 서슴없다. 그 가운데 메리언은 독창 발라드 무대를 선택받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으며, 맑은 영혼의 울림을 들려준다. 멋진 노력들의 결과로 예선전에서 당당하게 합격목걸이를 건네받은 이 ‘연금술사’ 팀(영화에서 ‘노인 연금 대상자’라는 의미의 팀명 O.A.P; Old-Age Pensioners는 ‘연금으로 술술 사는 사람들’로 재치 있는 번역이 이루어졌다.)은 본선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합창교실까지 아내를 보필하던 아서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 조금씩 조바심을 내기로 한다.


아서에게 허락된 시간적 운명이 나쁜 탓일까. 아내는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난다. 아내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던 아서에게조차 갑자기 닥친 죽음은 오열을 부르짖게 하는 아픈 운명. 아내는 독주 무대를 끝내 완성하지 못한다. 아서는 메리언에게 큰 행복을 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에 자신을 원망한다. 그럴수록 아서는 메리언을 되뇌고 기억한다. 그녀가 좋아하던 것들을 떠올리며 그녀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기로 한다. 곧 아서는 엘리자베스 선생님에게 숨겨두었던 노래 실력을 보여 준다. 그는 Charile Rich의 <The Most Beautiful Girl> 가사를 나지막이 되새긴다. 그의 음색은 메리언의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절실하다. 아서는 메리언의 독주 무대를, 그 노래의 꿈을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영화의 프레임은 줄곧 메리언과 아서 두 인물을 함께 담아내기에 바빴다.

휠체어를 끌며 음악교실 주변을 배회할 때, 고요한 잠자리에 들면서 남겨질 것에 대한 약속을 주고받을 때, 둘은 언제나 함께다. 영화 중반부를 넘어가면 프레임은 어느덧 인물 하나만을 조심스레 비추기 시작한다. 그의 동행자는 사라지고 없다. 영화의 시점은 홀로 남겨진 아서의 동선에 더욱 확고해진다. 그의 처진 표정과 주눅 든 말투, 아들을 피하는 그의 눈동자까지 모두 아래를 향하는 듯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카메라 앵글은 고독한 죄책감을 담는다. 이를 읽는 관객은 잠시 말없이 회고하고 절망하는 아서를 기다린다.


이내, 메리언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다짐은 기다린 관객으로 하여금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내가 좋아했던 합창 무대에 대신해서 올라섬으로써 못다 한 사랑을 확고하게 들려주겠다는 아서의 생각은 어두웠던 상실의 배경에 동요를 일으킨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모습은 아내를 위한 자신감의 것으로 변하면서 굵고 빨라진 아서의 걸음에 보는 이들마저 스토리의 전환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표현을 한다. 영화 초반부 내내 표현하는 것에 미숙한 그의 행동들이 하나둘씩 직간접적으로 드러났으나, 이제는 그의 몸가짐이 조금씩 달라진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할 줄 알게 되는 것. 아서는 그 점을 보여주기로 한 듯하다. 진득이 아서의 성격과 행동을 파악해 온 관객들은 서서히 변하는 그의 언행을 마주하며, 가뿐한 감상을 하나씩 주워 담게 된다.


Sorry… Sorry.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아서는 자신이 느끼는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사랑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독주 무대 위에서 전달한다. 클라이맥스가 이어진다. 무대 앞 관객들은 감정과 고통을 되새기는 그의 가삿말을 조용히 듣는다. 그 아무도 아서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가 아내를 위해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을 재촉 없이 허락한다.


Goodnight my Angel,

Now it's time to sleep

And still so many things I want to say

잘 자요 나의 천사,

이제 잠들 시간이에요.

말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요.


Remember all the songs you sang for me

When we went sailing on an emerald bay

And like a boat out on the ocean

I’m rocking you to sleep

에메랄드빛 해변 위를 항해할 적에

당신이 날 위해 불러 준 노래들이 기억나요.

그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당신을 잠에 들게 합니다.


-Billy Joel의 노래 <Lullabye> 중에서


이젠 영원히 잠들어야 할 메리언에게 아서는 나지막한 자장가를 불러 준다. 노래를 좋아하던 메리언이 자신을 위해 불러 준 노래를 기억할 것임을,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영혼의 모습들을 기억할 것임을, 그렇게 절박하면서도 못다 한 진심들을 꺼내며 사과의 노래로 표현한다.




아서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내가 다 대신 사과드리고 싶을 정도.

하루는 메리언을 위해 몸소 집까지 찾아온 노래교실 어르신들에게 아서는 고함을 치고야 만다. 이후 메리언의 귀여운 협박에 응해, 직접 제 발로 노래교실에 찾아가 수줍은 사과를 건넨다. 그때부터, 모진 성격 탓으로 아내에게, 언성을 높인 죄로 엘리자베스 선생님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해주지 못한 죄로 아들에게 모두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고집스러운 성격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내뱉는 인물은 단연 아서다.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말해 두고 싶진 않다. 무뚝뚝함 속에도 줄곧 메리언만을 신경 쓰던 귀한 남편 노릇에 최선인 그다. 울퉁불퉁한 겉면을 지녔더라도 영화의 시선이 따갑지 않은 이유는 아내에게 건네는 숨은 손길들이 살며시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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