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 - '런던이 왜 좋아' 하고 묻는 지인들에게 보내는 답신
어느새 영국에 산지 만 2년 하고 두 달 정도가 되었다.
세 번째로 맞이한 가을은 역시나 언제 그랬냐는 듯 여름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자꾸만 침대에 들어가고 싶은 날씨다. 조만간 옷장 맨 윗공간에 고이 모셔뒀던 전기장판을 꺼내야겠다. 내일 출근할 때 트렌치 코트를 입을지, 제대로 된 코트를 입을지, 지하철은 더울텐데, 고민이 되는 밤이다.
이 나라는 정말이지 날씨에 진심이다. 여름이 오기도 전인 4, 5월에는 만났다 하면 '여름이 오고 있다', '오늘은 비가 안 온다'고 들떠 있다가 7-8월에는 벌써 가을 겨울 걱정을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가을과 겨울의 런던은 하루에도 비가 몇 번씩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한국처럼 영하 15도까지 내려가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축축한 것이 왠지 더 버겁게 느껴진다. 오후 세네 시면 해가 지는데, 이 어둠이 아직까지도 제일 어렵다. 그렇다고 아침에 해가 일찍 뜨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출근하려고 일어나면 밖은 여전히 어둡다. 샤워하러 가는 길이 왜 그리 추운지 (아무래도 온돌식 난방이 아니니까). 그래서 다들 일어나면 물부터 끓이나보다. 차를 마셔야 하니까!
이렇게 서로에게 다정하기 힘든 날씨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다름 아닌 더 만나고, 더 부대끼는 거다. 매일 집 안에 틀어박혀 넷플릭스만 보다가는 외롭고 헛헛해지기 십상이다. 어차피 집에만 있다간 난방비도 많이 나온다. 다행히 런던에는 할 것이 많다. 박물관, 갤러리, 무료 상설 전시부터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특별 전시까지. 퇴근 후에도 재즈 콘서트를 보러 갈 수 있고, 어딜가나 넓은 공원이 있으니 날이 좋으면 번개 피크닉을 할 수도 있고, 또 영국 음식은 맛없다 쳐도 (나는 소신 있게 말해보자면 영국 음식 맛있다는 편이다), 나이지리아, 캐리비안, 레바논 식당, 요즘 유행하는 페스츄리와 말차 맛집 등등에서 입이 즐거운 시간을 맘껏 보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외식을 즐기려면 평일에 열심히 요리해서 식비를 아껴야 하지만.
이처럼 할 것 많은 도시의 삶을 나는 앞으로 조금 더 즐기고 싶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석사 마무리와 취준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런던 직장인으로 1년을 보내며 이 도시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비자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매력적인 커리어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는 좀 눌러붙어 있으련다. 런던은 할 게 많아 재미있기도 하지만,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압도적 다양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양성에서 오는 해방감이 좋다.
거리를 걷다가, 튜브(지하철)를 타다가도 생전 처음 듣는 이국적인 언어들이 귀를 스치고, 온갖 피부색과 머리 모양, 종교를 드러내는 옷차림, 통 알 수 없는 패션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부딪힐까 다가오면 일단 "sorry"부터 내뱉는 게 어느새 모두가 영국인이 다 된 것만 같은, 그 은은한 뿌듯함과 복작거림이 좋다. 그리고 그 복작거림 틈에 낀 나는, 나름 한국에서는 제법 튀는 옷차림에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 정말 많다! 기차에서 신발을 신은 채로 앞좌석에 다리를 올려두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편해 보이기는 하더라), 튜브 안에서 닭다리를 뜯는 사람, 길 한가운데서 잘만 걷다가 냅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약에 취한 사람, 관광객의 휴대폰을 노리는 사람, 대낮부터 역사 앞에서 팬티를 벗고 오줌을 누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어느 큰 도시에나 있지만, 런던에선 유독 자주 마주친다. 그런데 그만큼 흔한 것이, 튜브에서 눈이 마주치면 빙긋 웃어주는 사람, 이웃도 아닌데 휠체어 승객을 위해 버스를 멈춰 세우고는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도와주는 사람, 대형견 다섯 마리를 한 번에 산책시키는 사람, 비바람에도 러닝을 멈추지 않는 사람, 담뱃불을 지펴주더니 'keep the lighter (라이터는 가지세요)' 라며 사라지는 사람, 연말연시에 'happy new year' 하고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사람. 그런 '이상함'은 내 하루에 기분 좋은 변주를 준다. 단조로운 일상에 조금은 지루함을 느낄 때쯤 찾아오는 이런 변주들이 나는 좋다.
그리고 그런 '이상함'을 어느새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 내 모습이 좋다. 화장기 없는 수더분한 얼굴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타투가 보이는 팔이 드러나는 노브라 드레스를 당당하게 입으며, 움직이는 튜브 안에서 일기를 쓰면서 헤드셋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사람이 나는 되었다. 친구와 길을 걸으며 스시와 맥주를 마셔도, 잔디밭에 비키니 차림으로 누워 일광욕을 해도,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다 마주친 시선 끝에도 관심이 있을 뿐 평가나 재단의 눈초리는 아니다.
내가 거적떼기를 입고 다녀도 그 누구의 시선도 내게 오래 머물지 않는 것. 그 자유가 이렇게 좋을 일인가? 이곳에 좀 더 살다 보면 이마저도 무뎌지겠지만, 아직은 이 해방감이 실체로 다가오는 것을 보니 조금 더 적응할 게 남았나보다. 아니면 뭐, 가끔 친구들이 "영국 어때?" 하고 물을 때 우스갯소리로 답하듯, 정말 '물고기가 물 만난' 건지.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해외살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 그 이야기는 차차 풀어보도록 하자.
사실 영국, 특히 런던은 사회 초중년생이 돈을 쉽게 모을 수 있는 도시는 아니다. 과장, 팀장 되는 사람들도 점심을 싸오며 생활비를 아낀다. 노동당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의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어딘가 핀트가 나간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정부와,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the rise of the far right (극우의 부상)' 현상으로 인해 정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민자로서 이 나라에 사는 것이 10년, 아니 5년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그래서 영국에 10년, 15년 넘게 살아온 한인 선배(?)들 중에는 '한때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영국을 지나 이민, 환경, 전쟁, 기술 등 온갖 위기 속에 허덕이는 지금을 보며 역이민을 고민하는 이들도 있다. 나야 아직 들뜬 마음으로 사는 3년 차 새내기일 뿐, 어디 당장 돌아갈 곳도 없고, 당분간은 잘 살아봐야지 - 해서 타자를 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쨌든,
영국 3년차 새내기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