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보다는 배출 같은 것 - 낙관을 잃지 않으려는 나 나름의 투쟁
나에게 기록은 수집보다는 배출에 가깝다.
결국 못 참고 펜을 드는 순간은 - 실은 타자기를 두드리는 행위에 가깝지만 - 정처 없이 흘러넘치는 생각과 감상들을 어딘가에 뱉어내야겠다는 강한 충돌이 들 때다. 인스타그램이나 쓰레드에는 조금 더 정제된 글을 쓰지만, 블로그나 일기장에는 낙서 같은 잡기가 가득하다. 그래도 그 지독하게 사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공개적인 배출 덕분에, 그대로 명멸할지 모를 순간들을 어딘가에 차곡차곡 저장해 둘 수 있었다.
기록은 또 정리정돈 같다.
내 방의 상태를 보면 한 주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바쁜 시기에는 이부자리가 구겨져 있고, 옷들은 제자리를 잃은 채 의자나 빨래바구니에 - 바구니 속도 아니고 옆에 - 널부러져 있다. 그럴때일수록 주말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어 방을 치워야 한다. 재택근무를 자주 하는 나로서는 정돈되지 않은 방이 불러오는 나비효과(?)를 잘 알기 때문이다. (정돈되지 않은 공간에서 일하다 보면 머릿속까지 복잡해진다. '나중에 몰아서 치우자'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내다 보면, 결국 '언젠가 치울 거니까 더러워져도 괜찮지'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 종국을 맞느니 지금 이 순간 조금씩 정돈하는 게 낫다.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생각들이 쌓이면 고요한 밤에도 머릿속은 시끄럽다. 잠에 쉽게 들지 못하고 두통이 시작된다. 그럴 때 일기장에 뭐라도 끄적이면 조금은 나아진다. 각기 다른 생각들을 체에 거르듯 써내려가다 보면, 내 머릿속을 월세도 내지 않고 차지하던 생각의 덩어리들이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난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지난 기록들을 읽고 깨달은 것은, 기록이란 행위가 낙관을 잃지 않으려는 나 나름의 투쟁이었다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도, 뮤지컬 <하데스 타운>에서도, 심지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도 말하듯 인간이라는 종족은 끊임없이, 질리도록 이야기를 하는 존재다. 평범한 이야기라도 계속 말하다 보면 언젠가 현실이 된다며, 우리는 상상을 말하고, 그렇게 믿으며, 그렇게 현실을 만들어간다. 오늘 있었던 회사에서의 가십, 이웃의 가정사, 먼 미래에 내가 맞이할 가족과 집, 혹은 가슴 뛰는 꿈까지도 - 설령 그 유일한 청중이 나 자신일지라도, 우리는 적고, 말하고, 노래로 남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에는 언제나 실낱 같은 낙관이 배어 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누구든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 아니 고통스러울수록 - 비극이 아닌 실은 낙관을 바라고 있다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저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싶을 때에도 결국 내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괜찮을 거야", "일단 자고 생각하자" 따위로 끝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희망 어린 시선이다. 그래, 그래서 나는 가장 힘들 때 결국 펜을 들었다. 낙관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난 2년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영국에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까지는 몇번이고 무너졌다. 지겹도록 부족한 나 자신을 마주해야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지난 1년은 웃은 날이 훨씬 많았다. 이유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중 몇몇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선택받은 가족(chosen family)'이 되어주었다.
런던은 때로 너무 시끄럽고 동시에 사무치게 외롭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문득 이 도시를 꼭 껴안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크고 작은 비극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여전히 더 보고, 더 듣고, 더 살아보고 싶게 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그 낙관을 조금 더 연장해 보려는 시도다. 말이 길었다. 앞으로 기록 좀 열심히 해 보겠다는 소리다. 우리의 이야기는 언젠가 현실이 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