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철학 초고 읽기(2022)>
유년시절 고운 천에 싸서 두 손 고이 들고 오다가 어른이라는 문지방을 넘으며 어쩌지 못하고 그만 놓쳐버린, 이룰 수 없다고 단념한 꿈이 있는가?
아직도 기억나는 학창 시절의 한 장면은 당시 그 해 정년퇴직인 나이 지긋한 사회 선생님이 애써 미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꿈이었는데... 못했지. 하며 거무죽죽한 칠판에 적힌 하얀 두 글자의 직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그의 꿈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슬퍼보이는지 알지는 못해도 그것이 쉽게 삼킬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보다 익히 알려진 장면도 있다. 한 어부가 바다를 향해 못 이룬 꿈을 조지훈의 '사모'라는 시로 읊조리는 것. 한 잔은 떠나간 너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꾼다. 타자에게 부여받은 의무에 의해 꾸역꾸역 기워내는 삶이 아니라 돈 걱정 없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며, 내가 기대를 품고 목적하고 의도한 것이 실제 세상에 미치는 뿌듯한 영향력을 바라보는 삶. 그런 일련의 과정과 결과로 인해 내가 정의되고 변화하는 삶. 마르크스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유적존재"라고 표현한다. 유적존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남부끄럽지 않기 위해, 이 사회와 시스템 안에서 언제든 대체되지 않기 위해 경쟁하는 하나의 작은 부품이 아니다. 이 생의 끝에 남겨둘 산출물을 나의 목소리로 정하고, 스스로의 목적과 의식, 의지를 가지고 생산활동을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내가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 스스로 기획하고 목적한 바를 자연에 투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유적존재로 살며 얻을 수 있는 것은 뭘까? 생물학적인 욕구 충족과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 외에도 다른 자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차단당하지 않는 것이다. 일한 후 얻은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쌓아두기 위해 점점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동 행위의 결과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
사실 나만 해도 워낙 하고 싶은게 많은 사람이다. 못 가본 세상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사는 편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안분지족 안빈낙도와는 거리가 멀고, 마르크스가 얘기하는 노동을 해도 생계가 유지되면 가장 행복해할 사람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얼마간은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해보려고 애써보고, 또 얼마간은 외국어를 배워서 그저 세계를 유랑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보며 얘기들도 해보고, 클라이밍장에 가서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를 만들고 설치도 해보고 싶고, 얼마간은 방구석에 누워 하루종일 책이나 잔뜩 읽고 그러다 이젠 바깥구경 좀 해야겠다 싶으면 재밌는 전시를 보고 나온 김에 책을 쓴 저자나 전시회를 하는 당사자들을 찾아가 붙잡아 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떠들어대고도 싶다. 한동안은 증권가나 은행가 가서 열심히 숫자보며 사는 것도 나름 재밌겠는걸. 음식평론가 같은 걸 하면서 음식의 디테일한 맛을 묘사하는 일에 천착해봐도 즐거울 것 같다. 근데 그러다가 문득 모든 인간이 유적존재로 살아가길 바라는가에 대해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어떤 인간은 생산하기보다 그저 향유하기만을 바라진 않을까? 어쩌면 관념적인 일을 수행한 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꼭 물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생산'을 해야하나? 누군가는 굳이 수고스럽게 목적은 가지고 의도를 계획하지만 자연환경을 변화시키는 일까지는 가지 않는다면? 혹은 목적이나 의도 설정 없이 그저 즉흥적인 자연 환경 변화만 즐긴다면? 혹은 두 가지가 이어지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즉, 생산까지의 시간이 죽기 전까지 될지 말지 알 수 없을 만한 자는? 그는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르크스가 정의하는 노동을 하지 않는/ 원치 않는 인간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화과정으로 인해 지친 인간일 뿐인가?
그래서 요즘 노동의 소외와 외화로 가장 많이 지친 것 같은 지인 몇몇에게 물어봤다. 마르크스가 정의하는 노동과 유적 존재 개념에 대해 설명해주고, 만약 이런 세상이 온다면 무슨 노동이 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첫 번째 지인은 난 그냥 영화만 보고 싶은데 굳이 뭘 만들어야 하냐고 물었다. 꼭 뭔가 환경에 변화를 주고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면 나무심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취미로 일렉을 배우는 두 번째 지인은 신디사이저 음악을 만들며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 지인은 자신은 그저 소비만 잔뜩 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근육, 힘, 지력, 육체적 에너지를 통해 자연을 변형하게 되고, 이 변형된 자연을 자신의 산물로 삼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증한다고 했다. 그는 지적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분해서 볼까? 그에게는 인간이 생산한 것이 정신이나 관념만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으로 구현되고 살고 있는 환경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의 변화를 중요시 했던 것 같은데, 어떤 지식노동자는 노동의 결과가 물질이 아닌 관념이 변하는 순수 학문에 종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최신 통계학을 연구하는 방법론 전공자 등. 그들은 좀 더 실생활과 관련된 학문에 종사하는 다른 인간 존재와 연결될 때서야 실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온다. 다른 인간 존재도 자연의 일부라고 한다면 그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문득 또 드는 걱정은 실제로 각자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둔다면 모두가 기피하는 노동은 어떡하나하는 것이다. 그 일을 원하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해도 충분한 수가 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 도래할 공산주의 사회를 생산력이 발달해 물질적 필요와 궁핍으로부터 벗어난 사회라고 말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이뤄낸 물질적 풍요를 소수의 독점으로부터 해방시켜 사회 구성원 모두의 필요에 따른 분배를 보장하고, 인간다운 삶의 품위와 존엄을 보장하는 사회. 그건 어쩌면 너무나도 분절되어 지극히 단순한 노동이라 아무도 선호하지 않는 일, 혹은 위험하거나 노동조건이 너무나도 열악한 일을 기계가 다 대체한 후에나 가능한 세상은 아닌가? 이렇게 조각조각 분절되어 대체되는 과정은 어쩌면 그가 그리던 공산주의 사회가 현실적으로 도래할수 있도록 선행되어야할 과정일수도 있을까?
키워드 : 유적존재, 노동, 노동의 소외, 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