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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Nov 05. 2022

한 잔만 할 수 없었던, 파비오 게아 백그린

Fabio Gea, Back green 2019




12시 10분, 자정이 넘어 도착했다. 아까 카톡으로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두 아이의 엄마는 씻는지 화장실 물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과 함께 거실에 가득하다. 누가왔나 궁금해 나왔던 로로는 내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방으로 도망을 가고 베베가 천천히 내게로 걸어 온다. 안녕? 이모 왔어. 나직하고 상냥한 톤으로 말하며 익숙하게 큰 방에 짐을 푼다. 겉옷을 벗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아까 부탁한 초코케이크가 있는지 냉장고를 열어본다. 빽빽한 100리터짜리 작은 냉장고 한 켠에서 우리가 마실 와인을 발견한다. 지현이가 작년쯤 사둔 이태리 피에몬테 지역의 레드 와인이다. 당시 거금을 들여 와인 몇 병을 샀노라 내게 연락을 했었는데, 이 와인은 맛보다는 조금 독특한 병의 모양새에 매력을 느껴 구입했다고 했었다. 와인의 균형미 보다는 신선함과 독특함에 끌렸던 작년부터 게 중 특색 있는 와인들은 다 마시고, 이게 마지막 병이었다. 오는 길 SNS를 통해 마셔본 이들의 테이스팅 노트를 찾아보았다. 내추럴와인을 마실 때면 자주 그렇듯 와인의 향과 맛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가 거의 없었다. 내추럴 와인샵 두어 곳에서 올린 노트를 찾았다. 한 곳은 아쉽게도 동일 와인메이커의 다른 꿰베였다. 성에 차지 않아 영어나 일어로 된 코멘터리를 찾아 번역기를 돌려 읽어보니 라이트한 바디와 딸기가 느껴지는 상큼함, 허브향에 대한 코멘트가 주됐다. 헤비한 안주랑 먹기에는 시간이 늦기도 했고, 가벼운 텍스쳐의 초코케이크랑 잘 어울릴 것 같아 투썸의 스트로베리 초콜릿생크림케이크를 부탁했다. 요새 딸기 수급이 어렵다며 많은 매장에서 재고가 없단 소리를 들었었는데 용케 구했다. 장하다, 내 동생.



냉장고를 열고 서 있는 내게 베베가 와서 아는 체를 한다. 아이고 귀여워, 베베 잘 있었어? 자세를 구부려 베베의 등줄기를 쓸어 내린다. 부드럽고 따듯하다. 벌컥, 나체의 여인이 젖은 머리를 두르고 나왔다 아우씨, 깜짝이야. 언제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자정을 30분이나 넘은 시각에 들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오늘 못 올 뻔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시각이다. 팬티부터 입을 것이지 동생은 얼굴에 스킨을 바르며 말한다. 오빠는? 10시 넘어 들어와서 혼자 밥 먹는데 나왔어. 너무 미안했는데 안 올 수는 없었어. 애들은? 다 재우고 왔지. 오빠가 내일부터 고생이지 뭐. 이 망원동 집엔 금요일 저녁에 도착하는 계획이었는데 남편의 야근으로 토요일에 온 셈이었다.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일찍 이동하는 게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두 아이가 깨우는 아침이 아닌 내 자의로 일어나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 야밤에 택시를 타고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온 것이다. 나 이 초코케이크에 와인 딱 한 잔만 마시고 잘 거야. 그래라. 말은 그러면서도, 자기 먹을 거라며 부라타 치즈 옆으로 샤인머스캣을 듬뿍 올린다. 올리브오일과 소금에 진심인 나는 챙겨 온 오일을 그 위에 두르고 소금을 뿌린다. 크래커도 내고, 같이 먹을 버터와 크림치즈, 메이플시럽도 덜어 식탁 위에 낸다. 동생은 아까 먹으려고 해 뒀다는 떡볶이도 식탁 끄트머리에 올린다. 소담하게 켜 둔 초 옆으로 뚝딱 작은 안주상이 마련됐다.




이제 와인을 딴다. 아까 왔을 때 따 놓을걸. 열면 딱 한 잔만 하고 잘 건데, 오픈 직후 풀어지지 않은 와인에 아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이 집에 들어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와인 오픈 아니었을까 잠시 후회했다. 아쉬움을 잔뜩 머금고 와인을 열었는데, 뭐야. 병 입구에 코를 들여다 대려는 순간 그 첫 향에 이미 나는 이 와인에 매료돼 버렸다.


작은 와인 잔을 고른 탓에 스왈링은 크게 하지 못한 채, 한 모금을 마신다. 살짝 쿰쿰한 향이 올라오고, 딸기와 자두 같은 풍부한 붉은 베리류 향이 부드럽게 풍긴다. 내가 와인 향 중 기절할 만큼 좋아하는 흙 냄새, 미네랄리티가 단아한 모습으로 단단하게 구조감을 잡아준다. 마치 서늘한 계절, 새벽녘이나 초저녁 한적한 시골동네에서 소박한 밭들을 옆으로 두고 흙 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저 멀리 지평선이 아늑하게 느껴지고, 어디선가 아우~하고 강아지 우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어둠이 반인 하늘에는 울긋불긋 붉고 사랑스러운 색들이 여기저기 꽃처럼 피어있다. 축축하고 습기 가득한 공기가 차디찬데도 싫지 않다. 오히려 내 표피를 곧추 세우는 그 선명하고 차가운 공기의 모서리들에 나의 감각이 살아나는 것만 같다. 내 오감의 촉수들이 길게 뻗어 나가는 기분이 든다. 또렷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에 대한 믿음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그리고 마침내, 내 코와 혀가 느끼는 모든 감각을 나는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된다. 너무 맛있어!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이 닿아 있는 이태리 북서쪽에 위치한 피에몬테 지역은 알프스 산맥의 끝자락으로 ‘산맥의 발’이라 불리기도 한다. 덕분에 여름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춥다. 가을엔 안개가 많기로 유명하다. 토양은 풍부한 석회질과 진흙으로 이루어져 포도를 기르기에 매우 적합한 땅이다. 석회질 토양은 먼 옛날 조개껍데기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이기 때문에 통기성이 좋고 수분함량이 높다. 때문에 건조한 날씨에는 토양의 수분을 유지하게 하고, 서늘한 기후에는 배수가 좋게 한다. 또한 주위의 양분을 잘 흡수할 수 있고 주변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향을 응집시킬 수 있게 한다. 진흙은 토양의 수분 유지를 돕고 석회토질의 부족한 철을 채워 밸런스를 맞추는 역할도 한다. 네비올로는 이런 토양과 기후에 잘 맞는 피에몬테의 핵심 품종으로, 체리와 산딸기, 들장미, 낙엽이나 버섯 같은 흙과 관련된 다양한 향을 가진 진하고 풍부한 맛이 특색이다. 강한 탄닌을 가져 이태리의 장기숙성형 고품질 와인인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만든다. 그 외에도 네비올로보다 낮은 탄닌에 높은 산미, 검은 과실미를 가진 바르베라, 블랙베리와 감초 향이 특색이고 낮은 산도를 가진 돌체토도 많이 생산된다.


파비오 게아의 백그린은 조금 낯선 품종으로 양조 된 레드와인이다. 그리뇰리노 라는 품종인데, 빛깔은 옅고 투명한 붉은 색이다. 여린 와인 색에서 알 수 있듯 딸기나 체리, 자두 같은 붉은 과실미가 풍부하다. 나는 흙 냄새를 큰 매력으로 보는데 이 와인은 특유의 쿰쿰한 향과 함께 올라오는 젖은 땅 냄새, 민트처럼 살짝 매운 산뜻한 녹색 허브향, 토양의 특징이 반영된 진한 미네랄리티 등이 함께 느껴졌다. 부족하지 않은 산미가 그런 맛들을 끌어올려 보다 풍성하게 느껴지게 했다. 찾아보니 이 품종은 씨가 많아 일반적인 압착 방식으로는 씨에서 나오는 텁텁한 맛이 도드라질 수 있어 느리게 압착하여 오래 침용하는 방식으로 양조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탄닌이 전체 구조를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덕분인지 입 안의 여운이 오래 간다. 전혀 단 한 잔으로 끝낼 수 있는 와인이 아니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 와인의 또렷한 윤곽은 와인을 더욱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했고, 그 과정에서 읽히는 분명하지만 거칠지 않은 특색들이 좋은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균형미가 좋은 와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와인메이커 파비오 게아는 이탈리아의 이상주의자이자 혁신가, 괴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독특하게 지질학자 이력이 있다. 와인에서 중요한 포도, 포도에서 중요한 땅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맛있는 와인을 만든 것이 아닐까? 고작 학교 운동장 두 개만한 크기의 땅에서 연필로 와인 라벨링을 할 만큼 적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렇게 섬세하고 밸런스 좋은 와인을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내 입맛에 딱인데 생산 수량이 적다고 하니 보이면 무조건 마시는 걸로. 다른 꿰베도 분명 내게 어마어마한 매력을 알려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이 와인을 마실 수 있도록 1년 전 백그린을 구입한 동생과, 지금은 사라진 연희동 내추럴와인샵 틴코 사장님께 깊은 감사함을 전한다. 아 그리고 국내 수입사에도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베베야 로로야, 이모 술 마아아아이 마시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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