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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Jun 29. 2023

Wild wild wild, 야생의 아름다움 루시마고

Lucy m. Dynamique cabernet franc 2021



문이 열리자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난다. 찾기 어렵기로 소문까지 난 이곳의 문을 직원이 친히 열어준다. 6월 중순부터 무더위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덕분에 한낮의 외출은 삼가라는 안전문자를 받았고, 그치만 나는 좀 전에 막 녹사평 역에 내려 옅은 바람을 헤치고 걸어온 참이다. 아직 열지 않은 매장 앞 작은 테라스에 앉아 숨을 고르고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샛파란 커버의 책을 꺼냈다. 제목은 여름 상설 공연. 이제 앞 페이지 몇 장을 읽었을 뿐이었다. 책에 몰입하지 못한 시간 사이로 오늘 루시마고를 만나러 여기에 왔다는 생각이 흐르자 가다듬었던 숨이 차츰 다시 뛰었다. 오전 11시 30분, 해방촌의 와인바이자 한낮에는 브런치집으로 알려진 내추럴하이가 이제 막 정문을 열며 영업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6월의 며칠 간, 난 틈이 나는 대로 밝은 머스터드빛 책 한 권을 밀도 있게 읽어 내려갔다. 그 안에서 만난 와이너리가 바로 오늘 찾아온, 호주의 내추럴 와인운동의 선구자 ‘루시마고’다. ‘루시마고’는 와인메이커 안톤 반 클로퍼가 딸 루시(lucy)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그는 남호주 애들레이드 힐즈에서 포도밭을 일구고 자연을 닮은 와인들을 양조해 왔으며, 현재는 이 에세이의 저자인 레이첼 시그너와 결혼을 해 함께 와인을 만들고 있다. "직접 포도나무를 재배해서 원료인 열매를 주는 포도나무와 성실한 관계를 쌓아 와인을 만들고 싶다.",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규칙을 깨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와 같은 그의 말은 와인과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알게 한다.


레이첼은 내추럴와인에 대한 글을 쓰다 와인메이커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은 내추럴 와인을 양조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하고 유쾌했다. 사랑하면서도 자주 괴롭고,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하기도 한 여성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 장면들은 복잡한 생각과 먼 산 같은 고민으로 속앓이 하는 내게 진한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온 몸과 마음으로 애쓰는 장면은 치열하게 취재를 하고 글을 써 내려가던 이전의 모습만큼이나 반짝였다. 자연이라는 물리적 여유로움, 그 안에서 와인과 사랑으로 다이나믹하게 채워진 시간은 야생미 넘치는 그들의 터전, 애들레이드 힐즈를 닮아 있었다.


‘랜드로버가 시골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없고 상업적인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길에 쏠린 알피가 계기판에서 튕겨 내 무릎에 안착했다. 날씬하게 쭉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 사이로 햇살이 강렬하게 비쳤다. 와일드맨은 내가 이 야생적이고 강렬한 황야의 아름디움을 감상할 수 있게 잠시 침묵을 지켜줬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지나자 공기가 훨씬 더 시원해지는 게 느껴졌다. 언덕에는 몸집이 큰 회색빛의 소무리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였고 반대편에는 거대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어떤 길로 들어서니 차가 한 대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자갈 도로가 나왔다. 앞에는 멋진 모호크 스타일의 노란색 깃털이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란 흰색 새가 날아다녔다.‘ (202p)




울고 웃으며 읽는 내내 후회했다. 재작년 성수의 한 와인바에서 진행했던 루시마고 글라스와인 데이에 가지 않은 것을. 그리고 그간 와인바에서 와인샵에서 루시마고를 시도해보지 않았던 나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루시마고는 적은 물량이나 여타의 이유로 샵이나 바에서 쉽게 만나기 어렵기도 하지만, 사실 너무 유명해서 좀 피하고 싶기도 했다. 늘 와인을 선택해야 할 때면, 당일의 직관적 끌림, 지역이나 품종 등을 따른 흐름, 특정 페어링을 위한 와인의 뉘앙스, 그 외에도 다소 명분이 필요한데, 단지 유명하단 이유로 와인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과거의 나를 변명해 본다.

하지만 루시마고에 대한 무경험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호주 내추럴 와인과 루시마고에 대해 보다 깊은 호기심과 열망에 휩싸일 수 있었고, 이야기에 더 몰입하고 와인의 맛과 향을, 그 풍경을 폭 넓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여기에 이렇게 온 것이 아닌가.



착석과 동시에 브런치용 메뉴판이 테이블에 놓여졌다. 나는 메뉴를 보기도 전에 미리 DM을 통해 문의해 두었던 루시마고의 와인 리스트를 직원에게 체크했다. 다수의 샵과 바에서는 재고가 동이나 보기 힘든 루시마고의 와인이 화이트부터 로제, 레드까지 총 10여종에 달했고, 게 중 염두하고 온 레드 3종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안내해 주길 부탁했다. 온리 가메, 온리 카베르네 프랑, 그리고 가메와 피노, 쉬라가 믹스된 꿰베였다. 모두 일반적인 호주 스타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벼운 레드 타입으로, 사실 와일드맨이 만들어 내는 쥬시펑키한 레드는 어떤 꿰베였더라도 한여름의 나를 만족시킬 것이었다.


‘내추럴 와인 애호가에게 ‘가벼운 레드’는 좋아하는 결정체를 의미한다. 살짝 후추 맛이 나면서 신선하고, 차갑게 마셔도 되고, 도수가 낮지만 화이트 와인보다 풍미와 복합미가 훨씬 깊은 와인 (101p)’


‘아직 와인이 되진 않았지만 와인을 향해 가는 맛을 살짝 띄고 있는 포도즙은 솔직히 맛있었다. 샛초록의 풋풋한 맛이 나긴 했지만 그 외에도 후추, 카레, 산딸기 잼과 빨간 사과맛도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다.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와일드맨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너네는 이 포도 따지 말자고 했지?!" 그 포도로 이런 와인이 만들어질지 그는 알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발효가 될 정도의 딱 적당한 양의 당분이 포도에 있다는 믿음 정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와일드맨은 봄에 가볍게 마시기에 훌륭한 와인으로 만들어질 거라 자신했다. 그가 순간에 한 선택이 명중한 거다. 그리고 추측해보는데 자존심 때문에도 일단 따고 보자고 했을 수도 있다. 그조차도 그 순간 불확실했을 수 있지만, 그럴 때 교과서에서 해답을 찾기보다는 직감을 믿고 밀어붙인 그의 성격이 낳은 결과다.(261p)’


미리 찾아보았던 꿰베별 뉘앙스를 점원과 확인하며 오늘 주문할 와인을 결정했다. 아침부터 진이 빠질만큼 덥고 뜨거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찐 여름이었다. 그런 더위엔 높은 산미와 굴직한 골격, 시원한 허브 뉘앙스를 주는 와인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런 와인이라면 나를 짙은 녹음이 진 여름숲으로, 깊은 야생으로 데려갈 것 같았다.





한 잔의 글라스 와인조차 없는 한낮의 테이블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깊고 둥근 잔에 맑고 밝은 빛 레드 와인을 따랐다. 이름은 dynamique cabernet franc, 카베르네프랑 단일 품종으로 양조했다. 단 4일 침용으로 워낙 짧은 기간만 발효한 후 압착했기 때문에 진하고 볼드한 레드의 맛보다는 가볍고 쥬시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산딸기같은 라이트 레드베리 향이 많이 난다고 해 조금 고민했지만, 그를 믿었다. 가볍고 상큼한 산미를 내면서도, 짙은 과실미의 골격을 가진 품종 본연의 캐릭터를 그저 묵살했을리 없다고. 그리고 올드바인에서 얻은 포도의 야생의 맛은 믿음직스러울 수 밖에 없으니. 무엇보다 그는 다이나믹의 대가, 와일드맨이 아닌가?


‘파리에서 강렬한 인상의 루시 마고 와인을 마신 뒤 온라인에서 열심히 검색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찾지 못했다. SNS를 통해 몇 가지 알게 된 바로는 그의 별명이 '와일드맨'이라는 것. 광기 있는 과학자와도 같은 그의 머리 때문에 생긴 별명일 텐데, 오늘은 그나마 좀 정돈된 느낌이다. 거기에 그는 바위에 올라가 즉흥적으로 시를 낭독하는 것을 좋아한다니 정말 특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또 그의 별명은 그가 남호주에서 만드는 극강으로 내추럴하고 야생적인(와일드) 와인을 빗대어 생겼을 것이다.(66p)'


그를 따라 숲과도 같은 포도밭으로 들어선다. 거칠게 입구를 가린채 자란 다채로운 나무 줄기와 풀들을 헤치고 들어서니 수분을 가득 머금어 투명하고 통통하게 빛나는 빨간 산딸기가 양 옆으로 열려있다. 발 아래에 난 여러 허브들을 손으로 쓸어 시원하고 알싸한 냄새를 맡아본다. 쿰쿰함을 더한 향을 지나 맛을 보니 잔잔하게 퍼지는 피지함이 느껴진다. 산딸기의 상큼하고 쌉쌀한 맛이 토독토독 터지는 뒤로, 다크베리의 도톰한 무게가 산미로 떨리는 입 안을 살며시 눌러준다. 그의 밭에서 느끼는 모든 감각이 상쾌하다. 한김 식은 발효차 같은 은은한 효모향이 입 안의 남은 공간을 채우고, 산미와 설렁한 무게로 들뜬 모서리들도 부드럽게 쓸어준다. 보슬보슬한 탄닌과 잔잔한 찝찔함이 혀에 얇게 막을 씌워 그 복합적인 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근래 보았던 한 향수 브랜드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들의 향의 모티브이자 근원이 되는 넓은 정원을 담은 영상이었다. 다양한 들풀과 허브류가 가득한 땅, 정제되고 구분되어진 정원이 아닌 다채로운 식물들이 저들끼리 조화를 이뤄내는 자연 자체의 정원. 중년의 여성이 흐드러지게 핀 풀과 꽃들을 꺾어 왼팔 한가득 끌어 안는다. 그녀가 걷는 걸음 뒤에서 들풀과 들꽃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의 많은 것이 자연으로부터 왔고, 자연에 가까운 상태에서 읽을 수 있는 본질적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아쉽게도 이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근래 찾기가 쉽지 않다. 와인도 대부분은 여전히 그 아쉬운 흐름 안에 있다. 포도를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량 재배하고, 가공의 과정에 충분한 첨가물을 넣어 효과적으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결함을 최소화 하는 여러 방식을 연구해 최대한 안정적인 길로 목표한 맛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모든 생명력은 배제되고 상실된다. 이자벨 르쥬롱은 그녀의 책 <내추럴와인> 첫 장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와인들은 영혼이 없었습니다. 맛은 있었을지 몰라도 마력이 없었어요."


'대부분의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이 그러하듯 그는 방문객인 우리에게 먼저 포도밭부터 보여주겠다 했다. 밭을 보기 전에는 그의 와인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리는 발목까지 올라온 풀과 꽃 틈에 서 있었다. 몸통과 가지가 두꺼운 포도나무는 지탱해주는 조형물 없이 정말 야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라마즈는 15년 전에 이 포도나무들을 심었는데 포도밭을 따로 관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포도밭에 특별한 에너지가 있음을 인지했다. 공기 중에 무언가 느껴졌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라마즈의 와인을 맛보면 이 느낌이 그대로 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75p)'


'어떻게, 어떤 와인을 만들지는 정하지 못했다. 와일드맨이 가르쳐준 대로 포도 알맹이부터 줄기까지 씹어서 맛을 느끼는 데에 집중했다. 줄기는 누가 먹어봐도 '초록초록' 했는데 덜 익은 채소를 먹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줄기를 제거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좋은 퀄리티의 아티자날 치즈를 먹을 때 가운데 크리미한 부분은 물론 겉껍질까지 같이 먹을 때 서로 중화시켜주는 그 맛을 좋아한다. 같은 매락에서 포도도 그렇게 다뤄볼까 했다. 대부분의 와인메이커들은 줄기를 제거하는데, 이는 발효될 때 산소량이 줄어 발효가 더 안전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포도가 '완전체' 상태로 발효되길 바랐다. 전문성을 갖고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직감을 따랐다(260p)'


살아있는 땅을 만들고, 유지하며 그 안에서 건강하고 충분히 매력적인 포도를 수확하고, 그 자체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방식으로 발효하는 과정을 거친 와인은 생명 그 자체다. 마시면 느껴지는 그 생생함, 그보다 아름다운게 또 있을까? 우리가 이보다 쉬운 방식으로 자연을 닮을 수 있을까?





우린 와인을 들고 뒤편 테라스로 나가기로 했다. 뒤늦게 온 동행과 와인을 나눠 마시며 와인 이야기와 근황 토크를 제법 마치고난 뒤였다. 현재온도는 32도, 자리를 옮겨도 될지 묻는 나를 보며 직원은 괜찮겠냐고 되려 물었다. 그가 야외 테이블을 닦는 동안 그늘 진 건물 안에서 작은 테라스로 내리쬐는 여름 빛을 감상했다. 테라스의 작은 땅에 심겨진 몇 그루 나무에도, 벤치용 긴 시멘트 덩어리 위에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철제와 스테인리스 사이의 테이블 위에도 뜨거운 여름 빛이 떨어진다. 다 되었다는 눈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간다. 온 몸에 여름볕이 떨어지니 지금껏 마신 와인들이 몸 안에서 부글부글 끌어 오를 것만 같다. 지금껏 에어컨 바람에 감싸 있던 바틀은 아직 시원했고, 나는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몸에 돌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이 작은 정원이 있어 다행이었다. 왠지 그의 와인은 그저 잘 다듬어진 실내에서 마시기엔 너무 아쉬웠다. 뭔가 더 자연의 곁에서 마시고 싶은 욕망이 드는 와인이었다. 물론 레이첼 그녀처럼 sns용 라벨 사진도 찍으려면 실내광보단 자연광이 훨씬 결과물이 좋으니까, 라는 생각도 했다. 생각처럼 사진은 잘 나왔고, 더위 속에서 온도가 오른 루시마고의 카프에선 토마토 맛이 났다. 푸릇한 채소의 풋내가 살짝 나면서 완전하게 익어 껍질조차 얇고 씹으면 살이 그대로 뭉게지는, 잘 익은 달디단 토마토를 닮은 여름 맛이었다. 계절의 빛과 바람이 나를 충분히 일깨우는 곳에서 푸르른 풍경을 벗 삼아 음미했기 때문이었을까? 와일드맨은 내가 느낀 이 한 잔의 맛을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그의 와인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 걸까?




‘단명해버린 이 선물의 운명을 보자 내추럴 와인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포도를 재배하고 양조하는데 들이는 그 긴 과정에도 불구하고 섭취하는데에는 불과 몇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와인을 마심으로써 느껴지는 감정적 안정과 생겨나는 동질감은 그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309p)'


내추럴와인을 마시면서 자주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곤 했다. 와인에 담긴 와인메이커의 긴 수고로움과 오랜시간 들인 마음은 나를 겸허하게 했다. 또 와인이 내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돕는, 와인메이커들의 신념을 존중하는 많은 사람들의 끈끈한 신뢰와 연대가 실로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들의 열정과 신념의 무게에 반해 마시는 건 레이첼 시그너의 말처럼 너무 한 순간이라 내 마음 속 존경과 감사는 너무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저 맛있다 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고 미안했다. 그래서 더 촘촘하게 맛과 향을 느끼고, 그들의 마음과 신념을, 자연에 대한 찬사와 경외감을 전해 받고자 했다. 그건 내게 쓰는 일이 되었다. 쓰기 위해 내가 느낀 것들을 곱씹고 되새기는 긴 과정은 그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채워가는 충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나의 지지와 연대의 진한 마음이기도 했다.


'서로의 차이점 중 몇 가지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둘을 가장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은 바로 내추럴 와인과 이를 만드는 정신임은 확실했다. 이 유대감 하나로 다시 한번 관계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기를 바라며, ...'(234p)




직접 만들어 손수 붙인다는 와인 라벨을 손으로 쓸어본다. 거친 질감의 종이 위에 그려진 그녀와 그들의 아이, 시몬의 얼굴을 쓰담아 본다. 정제 되지 않아 나무의 섬유질이 살아 있는 종이가 어느새 보드랍고 따뜻하다. 거칠고 투박한 와일드맨, 덜 정제하고 덜 개입한 내추럴와인, 그리고 순수한 자연, 그 명사들은 루시마고의 라벨처럼 결국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그의 와인을 들고 뒷산에 올라야지. 중턱 어딘가 너른 잔디밭 한 가운데 테이블에서 이 시원한 포도즙의 자연스러운 변형을 마시고 싶다. 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움직이는 벌레들이 오르고 내리는 땅의 냄새를, 오후에 내린다는 비 덕분인지 더 찝찔한 여름 숲내를, 다람쥐인지 들새인지 멧돼지인지 모를 움직이는 숲의 생명체들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온 몸으로 그 포도가 되어보고 싶다. 자연,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 가고 싶다. 활력 넘치는 야생, 그 자체가 되어 보고 싶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와일드맨과 레이첼의 와인에서, 또 무수한 내추럴와인에서 얻고자 하는 정수가 아닐까.





* 인용구는 <와인이 이어준 우리>, 원제< You had me at Pet-nat> 로부터

   레이첼 시그너 지음, 신혜원 옮김, npress 출판


*당일의 풍경을 담은 영상

https://www.instagram.com/reel/CtzDuwDpxXv/?igshid=NjZiM2M3MzIxNA==



* 더하는 말

‘내추럴 와인에 관한 가장 귀중한 안내서’ 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자벨 르쥬롱의 <내추럴와인> 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다. 레이첼 역시 그녀의 책에서 대부분의 생산자들에게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것이 사업이긴 하지만 돈을 버는게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하며 ‘그들의 배풂에 대한 성향은 내추럴 와인의 핵심’이라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내가 느낀 따뜻한 느낌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덧붙여 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진정한 내추럴 와인과 그에 가까운 와인들은 와인 업계에서 아주 적은 비율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어쩌다 한 번 만드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매년 특출한 내추럴 와인들을 생산하는 생산자들 말이다.

이러한 생산자들이 하는 일은 단순한 와인 양조를 넘어선다. 이들이 추구하는 철학, 삶의 방식은 이들의 와인이 심오한 매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 확실히 기여한다. 돈을 왕처럼 숭배하는 단절된 세상에서 이들은 다른 선택을 했으며, 그것이 유행이 되기 전부터 너무도 잘 해왔다. 이들은 신념,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힘인 생명을 양육하려는 열망으로 이러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또는 다른 생명체든 할 것 없이,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기본적으로 루아르의 내추럴 와인 생산자 장 프랑수아 쉐네가 말하듯, "살아 있는 것들을 그 무엇보다 더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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