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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Nov 07. 2022

무난함이 언제나 승리한다

에린남의 취향탐구생활

2022년 상반기 기준, 내가 가진 옷은 총 서른 벌이 조금 안 된다. 산책용 가벼운 옷부터 겨울 외투까지 전부 합친 숫자다. 외투는 패딩, 코트, 재킷, 후드 집업, 바람막이, 카디건을 종류 별로 하나씩만 갖고 있다. 상의는 반소매와 긴소매를 합쳐서 열세 벌이고, 나머지는 하의다. 길이와 소재가 다른 치마 세 벌과 바지 몇 벌이다. 그중 80퍼센트는 질리지 않고, 유행을 타지도 않으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기본적인 디자인이다. 색도 하얀색이나 검은색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무난한 옷장’이다.


그런 내게 여름 옷장을 채우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무덥고 불쾌 지수도 높지만, 나는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한다. 채도를 몇 단계 올린 것 같은 생기 도는 풍경이 좋다. 땀 흘리며 거리를 걸었어도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개운해지는 것도 좋다. 한입만 먹어도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수박과 물냉면이 있다는 것도 좋다. 시원한 카페에서 먹는 빙수는 어떻고! 물론 여름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여름의 태양은 뜨겁다 못해 따갑고, 반대로 실내는 에어컨 때문에 계절을 잊을 만큼 춥다. 여름을 잘 보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다. 바로 리넨 소재의 흰 셔츠!


새하얗고 품이 적당히 큰 리넨 셔츠는 긴소매로, 덥지 않으면서도 두 팔을 따가운 햇볕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통기성이 좋아 에어컨의 찬바람도 적절히 막아 준다. 길거리를 거닐면 여린 바람이 셔츠 안으로 송송 들어온다. 따듯한데 시원한 여름의 바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옷 자체가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청바지, 치마, 반바지, 슬랙스 등 어떤 하의와도 어색함 없이 어우러진다. 편안한 자리는 물론이고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도 적당히 어울린다. 그럴 때는 다림질해 하의 안에 셔츠를 잘 넣어 입는다. 평소에는 좀 구겨져도 상관없다. 그쪽이 더 편안해 보인다.


리넨 소재의 특성상 속옷이 비치긴 하지만, 하얀 민소매를 겹쳐 입을 때와 검은색 속옷만 입을 때의 차이로도 옷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오히려 매력적이다. 누군가는 무난하고 지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눈에 띄지 않아 매일 입기에 좋다(난 그런 옷이 더 좋더라).옷장을 열 때마다 내 손은 리넨 셔츠로 향했다.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계절 내내 리넨 셔츠를 입었다. 여러 벌도 아니고 딱 한 벌이라서 부지런히 세탁해야 했다. 얇은 소재라 약간의 햇빛만 있다면 빨리 마른다는 점도 여름옷으로서 완벽했다. 다행히 그렇게나 오래, 자주 입었는데도 옷은 여전히 빳빳한 자태를 뽐냈다. 사실 처음 리넨 셔츠를 샀을 때만 해도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으면 입을수록 애정이 생겼다. 이런 옷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막 샀을 때가 가장 기쁘고, 한두 번 입으

면 더 이상 손이 가지 않곤 했다. 이제는 이렇게 입을수록 나에게 꼭 맞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물건과 별일 없이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


무난하다는 말에 매력을 느낀다. 다 닳은 캔버스화를 버리고 새로운 운동화를 구경하는데, 리뷰에 무난하다는 평이 많다. 저 운동화 무난하구나. 그럼 내 옷들과 잘 어울리겠다! 어느 곳에서든 제 역할을 해내겠다 싶어 좋아 보인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로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싶을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넘치거나 부족함 없는 옷장을 만들고 싶다. 고민하며 하나하나 고른 덕분에, 이제 내 옷장에는 언제 어디서나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옷뿐이다. 그 무난함이 얼마나 든든한지!


해가 바뀌고 겨울이 끝나 갈 무렵부터 리넨 셔츠를 만지작거린다. 아직은 찬바람이 불지만 좋아하는 옷을 입을 생각에 벌써 설렌다. 리넨 셔츠를 입는 계절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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