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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Dec 26. 2019

서로의 시간을 완성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

<벌새>, <82년생 김지영>, <윤희에게>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일축된 시간’이 존재한다. 분명히 지나왔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희미하거나 토막 난 장면으로만 남아 있고 남에게 이치에 맞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시간. 이는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더 익숙한 감각일 수밖에 없다. 무언가가 그들의 시간을 앗아갔고, 사회의 지배적인 시간으로 바꿔치기해 그들의 머릿속에 다시 심었다. 이렇게 표현하니 언뜻 SF 소설의 발상 같기도 한데, 최근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한국 영화들에서도 이러한 시간에 대한 감각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중 <벌새>, <82년생 김지영>, <윤희에게>를 한번 들여다보자.


이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각각 10대와 20대(벌새), 30대(82년생 김지영), 40대(윤희에게) 여성의 일축된 시간에 대한 영화적 응답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영화 속 여성들인 은희, 영지, 지영, 윤희 중 하나와 비슷한 나이에, 어쩌면 이름조차 크게 다르지 않을 2010년대 말의 한국 여성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자기자신의 시간을 호출해 ‘다시 사는’ 의식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니, 그건[내가 언니를 좋아한다고 했던 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도발적인 명대사를 남긴 <벌새>는, 그 대사만큼이나 예민한 시간 감각을 보여준다. 1994년 대치동에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막내인 은희. 은희는 공부를 잘하거나 딱히 온순하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 날라리’도 아니고, 그 사이 어중간한 삶을 살아간다. 집과 학교, 사회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내다가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했다거나 귀에 혹이 나서 수술을 하게 됐다거나 하는 나쁜 사건 때뿐이다. 그 와중에 일상적으로 겪는 남자형제의 적극적 폭력, 가족의 소극적 폭력은 사건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시대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이러한 은희의 생활상은 들어 있지 않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입시 전쟁, 재개발 광풍과 철거민 투쟁,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등이 우리가 그 시간을 구성하는 당연한 재료다. 영화는 그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윤희라는 여자애의 별볼일없는 시간 속으로 끌고 들어와 배치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로 알려진 ‘벌새’는 멈춰 있는 듯 보이는 1초 동안에 실은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하고, 영화는 이 일축된 벌새의 1초를 잡아내려는 것처럼 은희의 열네 살 내부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82년생 김지영>의 시간은 어떨까. 4년째 육아 및 가사노동을 하고 있는 내 친구는 <82년생 김지영>의 예고편만 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아마도 거기서 자신의 시간을 목격해서일 것이다. 지영이 쉴 새 없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시간, 유모차를 끌고 나가서 천천히 흔들며 앉아 있는 그 짧은 시간, 그렇게 짧은데도 기어코 모욕당하고 마는 시간을 이 영화가 무심히 스크린에 올렸기 때문에. 육아노동과 가사노동만큼 ‘일축된 시간’에 어울리는 시간이 또 있을까. 체제는 모성을 자연화하면서 육아의 시간 역시 자연화하여 결국 ‘없는 것’으로 만든다. 거기에 ‘나인투식스’라는 자본주의 고용 노동의 신화는 가사노동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그 가치를 폄하한다.



<윤희에게>는 이러한 여성의 시간을 본격적으로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 주요 줄거리라는 면에서 특별하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정신병 취급을 받았던 가부장제의 시간, 그래서 자기자신이 아닌 채로 살아온 시간이 윤희에게 있었다. 스스로를 벌주면서 살아왔다는 윤희의 대사처럼, 어느 정도는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일축해버린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끝내 삭제되지 않고,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윤희의 옛 연인 쥰의 시간으로 거울처럼 살아 있었다. 여기에 딸 새봄의 또 다른 시간이, 윤희의 잃어버린 시간과 쥰의 보존된 시간을 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새봄의 ‘빅 픽처’에 따라 두 여성의 시간은 눈 내리는 ‘시계탑’ 앞에서 수렴하게 된다.


이렇듯 여성의 시간을 복구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여성의 시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이는 ‘빙의’라는 다소 무리한 설정으로 형상화되지만, 어쨌든 지영의 일축된 시간, 그로 인한 존재의 공백을 엄마, 할머니 등 다른 세대 여성들의 시간이 틈입해 채운다는 점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벌새>에서 은희의 시간에 끼어드는 것은 한문 선생님 영지의 시간이다. “그렇게 큰 다리가 무너지니, 어떻게”라는 영지 엄마의 흐느낌에서 전해져 오듯이, 무너진 것은 ‘큰 다리’만이 아니었다.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여공’ 노동자들의 시간을 체화하던 영지의 시간 역시 그렇게 무너졌다. 영지가 대학 휴학 중에(실제로는 학생운동으로 퇴학을 당했거나 수배 중일지도 모르는) 입시에 쓸모없는 한문을 가르쳤던 그 짧은 시간을 운명처럼 함께한 은희의 시간도 어느 부분 무너졌지만, 역설적으로 영지의 시간은 스러지기 전에 은희의 시간에 작고도 큰 숨을 불어넣는다. 이제 은희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때 손가락 하나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테고, 맞지 말고 맞서 싸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할 것이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영지가 은희에게 했던 말처럼, 세 영화의 주인공 은희, 지영, 윤희에게는 자기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필요할 것이다. 체제에 의해 일축된 시간이 길고 험할수록 복구가 쉽진 않겠지만, 자신의 시간을 채워 넣어 상대의 시간을 완성해가는 이 여성들의 ‘시간 연대’가 마냥 꿈같이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은희 앞에 놓인 스케치북(영지의 마지막 선물)과, 지영 앞에 놓인 컴퓨터 화면의 빈 문서, 윤희가 다시 써보기로 결심한 이력서, 그 새로운 공백을 채워갈 그녀들의, 그리고 나의 온전한 시간을 기대해본다.



글쓴이 양선화(출판편집노동자)


*이 글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님과 함께 진행한 비평쓰기모임 [충분히 읽었다, 이제는 쓸 시간]의 최종과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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