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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May 16. 2020

우리에게 퀴어함을 묻는 영화들

나는 2008년 쓴 <멀티미디어와 시간의 흐름 속 육체의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동차, 비행기, 고층 빌딩, 우주 탐사와 같은 21세기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은 자신을 이 땅 위에 서 있게 하는 육체에는 많이 적용되지 못했다. 이것은 육체를 개조하는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상상력을 뜻한다. 종교는 태어날 때부터 다양했던 것이 아니다.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기도 하고 기존 종교에서 갈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성 역시 처음에는 2가지로 출발하지만[각주1]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사회적 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여성, 남성 같은 잣대로 인간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하나의 존재, 존재마다 각각 유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나온 자신만의 가치, 즉 각 개인이 섹스(sex)가 아니라 각각의 젠더(gender)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어 본다.

(중략)

인간은 정확히 자신의 육체만큼을 세상에 놓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만큼의 영역밖에 활동을 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육체보다 훨씬 높게, 훨씬 낮게, 훨씬 다르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제 단 하나의 혹은 두 개의 코드로 모든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한 개인을 설명하려면 그 고유의 코드를 가져야 해석 가능한 시대,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닐까?”


12년이 지난 현재, 그때 내가 꿈꿨던 이상적인 사회가 오진 않았지만 나는 ‘고유의 코드’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퀴어’라는 단어를 만났다. ‘기묘한, 괴상한’이라는 뜻을 지닌 성소수자들을 통칭하는 단어. 보통 성소수자라고 하면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를 대표적으로 떠올리지만 계속적으로 에이섹슈얼, 퀘스처닝 등 점점 다양한 성적 정체성이 발견된다고 할까 재정의된다고 할까 하고 있어서, 명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LGBT+ 첫걸음>에 실린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들만 해도 50여 개가 넘어간다. 


성적 정체성이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태라는 논의도 진행되는 한편 퀴어 영화는 해마다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이런 저런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퀴어 캐릭터에 감정이입하고 동일시하는 관객에게는 알게 모르게 이런 질문이 맴돌지 않을까? ‘나는 퀴어 친화적인가? 나는 얼마나 퀴어한가?’


퀴어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은 그저 장르 영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일까? 이성애 이분법이 철저한, 끊임없이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퀴어에 대해 나의 일로 생각할 순간은 많지 않다. 생각한다 해도 뭔가 유별난 것,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선을 긋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 발간된 성소수자 노동자를 통해 우리 사회의 차별 가득한 민낯을 드러낸 책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희정 지음, 오월의봄)를 보면 과연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틀에서 뽑아낼 수 있는 노동력을 정형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정상성’(퀴어)을 배제하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해도 얼마나 많은 여성과 남성이 ‘정상성’을 연기하는지 드러난다. 한 예로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가 타이트한 치마 유니폼, 친절한 하이톤 목소리, 빨간색 립스틱 등의 복장규정에 맞춰 자신의 정체성을 가려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성별 이분법에 맞는 ‘정상 노동자’를 규격화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편리하게 재생산권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이성애 중심-정상가족 서사는 다른 종류의 욕망의 목을 조르고 한남 시네마틱 유니버스[각주2]에서 반복되며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니 관객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남성 욕망의 속성을 그야말로 심화학습하듯 되새기고 체화한다. 

남성의 자위 장면은 유머 코드와 가벼운 간식처럼 등장하고 강간 장면은 어쩔 수 없는 남성 욕구의 배출구이며 여성혐오 살인자 캐릭터마저도 성적 장애에 따른 억눌린 욕구 표출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사랑은 곧 연애고 연애는 곧 섹스인 이성애 이분법적 사회에서 ‘연애의 목적’은 섹스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로 사랑하는 이성이 만나 가족이 되면 일순간 ‘가족끼리는 자는 게 아니’라며[각주3] 결혼한 여성의 성적 욕구를 격하시키고 가사라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노동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러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 희생을 감수하고 만들어낸 정상가족은 고정된 역할을 수행하며 끊임없이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가부장주의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떠안기며 살아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상가족 사회의 뒤틀린 이면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는 영화가 <82년생 김지영>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캐릭터들은 전형적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이걸 왜 영화로 만들었냐고 되묻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면 전형적인 모든 것을 몰아넣었음에도 공감을 받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 있을까? 전형적이지만 한번도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들이 홀로 감내해야 했던 피해 경험이 정신병을 일으킨 김지영을 통해 종합선물세트처럼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아직도 빙의라는 이상 상태로밖에 표출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공통 기억을 건드렸다. 정유미, 공유라는 배우가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330만이라는 관객을 끌어 모았을지는 물음표이기는 하지만. 


물론 <82년생 김지영>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 여성들의 성차별 경험을 몰아넣었기에 대표적이면서 아무것도 대표하지 못한다. 마치 효과는 있지만 효능은 없는 약처럼. 공감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는 바뀌지 않은, 아니 영화보다 더 억울한 현실이 이어진다. 무엇이 이 영화의 효과일까. ‘페미니즘 어떻게 생각해?’란 말은 입 밖에 내기 부담스럽지만 정유미가 연기한 ‘82년생 김지영 봤어?’는 입에서 입으로 옮길 수 있는 말로 사람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인식 차이를 확인할 있는 대화를 촉발했다는 것? 분열된 사회 속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페미니즘 친화적’인지 알 수 있는 물꼬를 틀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도였을까? 


이성애가 아닌, 그래서 정상가족 환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퀴어 영화’를 생각해 본다. 많은 퀴어 영화를 섭렵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심도 있게 퀴어 영화를 비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잠시 2019년에 진성 덕후들을 대거 모았던 <불한당>을 살펴보자면, 퀴어 영화라기보다는 서브컬쳐인 BL장르의 전형적인 로맨스 코드를 빌려왔기 때문에 명백히 예쁜 수와 거친 공의 이미지를 이용한 이성애식 위계가 존재하는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면에 흑인 정체성과 게이 정체성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소외되는 인간을 재현한 <문라이트> 같은 심도 깊게 퀴어 정체성을 파고든 영화도 있지만 아직 한국 영화에서 게이를 재현하는 퀴어 영화에서는 남성 연대의 위계질서 속 사랑과 의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의 한남 유니버스에서의 관계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노래가 끝나면 둘씩 짝지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탈락하는 무한경쟁 시대에서 어쩌면 여성의 ‘다른’ 욕망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것은 김지영처럼 자아분열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곤란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성 간의 섹스를 전제로 한 사랑, 여성의 모성애, 남성의 의리 말고 다른 종류의 ‘사랑’을 우리는 정말 상상할 수 없을까?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감정의 이름이 왜 이렇게 빈곤하게 느껴지는 걸까? 얼마나 빈곤하면 한때 ‘우정’이나 ‘애정’이라는 명사를 동사화하여 ‘우정한다’ 또는 ‘애정한다’는 말을 쓰기까지 했을까. 다양한 ‘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레즈비언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는 뭔가 다른 감정을, 새로운 상상의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 미국 드라마 <엘워드>는 레즈비언 스테레오 타입이 잔뜩 등장한다. 그야말로 레즈비언 사회를 신랄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인데, 남성이 다른 여성에게 여자친구를 빼앗기는 배덕감 넘치는 첫 에피소드부터 자유 연애를 즐기는 레즈비언들의 자극적인 영상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막장 드라마를 볼 때처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드라마를 감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 <별나도 괜찮아>에서는 좀더 나아간 퀴어 재현을 보여준다. 고기능 자폐증이 있는 오빠가 있는 케이시는 처음 사귄 남자친구와 첫경험을 하지만 나중에 만난 여자 친구인 이지에게 육체적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남자친구인 에런에게 보내는 신뢰와 사랑의 감정, 그리고 이지에게 끌리는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케이시라는 인간을 통해 우리가 여러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감정을 통제하려 드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깨닫는다. 모든 이가 케이시 같은 상황에 처할 일이 절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드라마 속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성정체성을 보면 언제까지나 평생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되돌아 보게 된다.


미국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는 트랜스젠더와 레즈비언이 등장하는데, 감옥이라는 환경 때문에 의도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레즈비언을 평범한 일상과 분리된 사회 밑바닥에 머물러 있는 정체성으로 인식하게 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지점은 여성들(퀴어들) 사이의 여러 욕망과 감정을 표현한다는 데에 있다. 육체적 욕구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사랑 말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깨닫고 여장을 하는 남편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아내의 모습이 나오는데, 사랑하기에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행복을 빌어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강렬한 첫사랑도 아니고 육체적 이끌림도 아니고 정체성 때문에 정상가족 코스프레에서 튕겨져 나온 윤희와 새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첫사랑을 신체 접촉이나 다른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장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처럼 청춘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우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라이드>처럼 퀴어 정체성을 지키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영화도 아니다. 그저 어릴 때 여자 친구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가족에 의해 전환치료를 받고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 딸을 낳은, 겉에서 보면 자녀가 하나 있는 이혼한 중년 여성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때’를 그린 작품이다. 겉에서 보면 ‘그들’ 또는 ‘우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차별받은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퀴어인 걸 사람들이 모르니까. 그런데 바로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이 든다. 퀴어노동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숨겨지는 방식으로 소비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143쪽, 인터뷰이 혜민(바이섹슈얼)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에서는 패싱이라는 말이 나온다. 성소수자이지만 사회가 정해놓은 성별 이분법에 들어맞는 외모를 지닐 경우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들키지 않고 패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윤희도 정상가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겉모습 덕분에(?) 지금의 평범해 보이는 중년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운’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정성별이 남성이거나 표현성별과 지정성별이 일치해 패싱이 가능한 몸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운’은 운이 아니다. 운이라 표현되는 또 하나의 자원이다. ‘운’의 유무는 간극을 만들어낸다. 

- 같은 책, 157쪽


어쩌면 우리는 운이 좋아서 ‘어쩔 수 없이’ 패싱하고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누구일지는 마피아 게임에서 범인들이 고개를 들어 눈빛을 교환할 때가 와야만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윤희에게>를 본 후 사람들은 ‘퀴어 영화이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말을 한다. 이 영화에는 그런 특별함과 평범함이 있다. 누군가를 오랜 시간 그리워하는 감정, 말 걸고 싶지만 상대를 위해 참는 감정,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감정, 모녀 사이의 모성애보다는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 대 인간으로써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 안타까운 거리를 좁혀주려 하는 마음.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세상이 전보다 아주 조금 아름다워 보였다. 누군가 만든 구분선을 모두 지우고 영화의 배경이었던 눈 쌓인 오타루처럼 하얀 눈으로 새하얀 캔버스에 겹치는 색 없는 잉크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최면 걸린 삶을 살아낸다. 잘 버틸 수 있다고 믿는 당신 옆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쓸모와 ‘정상’의 문턱을 넘어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퀴어’로서 지니는 빨강, 주황, 노랑……의 색을 버리고 세상이 칠한 색으로 존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 같은 책, 119쪽


<윤희에게>를 본 후 관객에게 남는 질문은 무엇일까? 나는 퀴어한가? 얼마나 퀴어한가? 퀴어의 사랑과 이성애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아니, 그 구분선 자체는 누가 만드는가? 내가 사람들에게 느끼는 사랑은 어떤 감정이지? 더 많은 질문이 우리를 관통할 수 있을까? 


모든 이가 퀴어라는 상상 위에 쌓아올려지는 영화를 보고 싶다. 우리에게 퀴어함을 묻는 영화는 결국 남의 일인 양 팔짱을 끼고 있는 우리에게 각자의 정상성에 대해 물어올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완전무결하게 ’정상적’이며 ‘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가?”라고.



각주

[1] 당시의 나는 무지하여 (혹은 무의식적으로) 간성(intersex)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을 무시하고 2가지 성별만 있다고 표현했다. 잘못된 표현이나 그때 당시의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를 둘러싼 환경의 젠더 의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에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인용했다.  

[2] ‘그 사내다움에 대하여: 음모론 시대의 남성성과 검사영화’ (손희정,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3] <공공의 적>을 비롯한 많은 (정상가족 서사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대사.




글쓴이 김민희(책덕 대표)


*이 글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님과 함께 진행한 비평쓰기모임 [충분히 읽었다, 이제는 쓸 시간]의 최종과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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