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기

타이 스마일

by 에바

기억은 더듬어 본다. 두 번째 해외여행이자, 보호자 없이 가는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제대로 된 영어 문장 하나 구사할 줄 모르는 나는, 오로지 좀 더 영어를 잘하는 친구 하나만을 믿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걱정과 설렘의 공존. 목적지는 태국이었다. 영어 국가가 아님에도 태국어를 못해 걱정이 아니라 영어를 못하는 게 걱정이 되었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우리는 몇 푼이라도 아껴보자며 마카오를 경유하는 항공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마카오까지 비행에는 한국인 승무원이 함께 했다. 위급 상황도 응급 상황도 별로 해당 사항이 없음에도 그저 같은 언어로 대화가 가능하단 사실에 어찌나 든든하던지.





이 인근에서 말을 거는 현지인을 조심하라

여행 첫날을 위해 한껏 멋을 부린 우린, 누가 봐도 여행객이었다.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가 생길 뻔도 했지만 강렬한 태양을 피할 선글라스까지 썼겠다, 무서울 게 없었다. 그렇게 친구와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에서 멀지 않은 사원을 구경하러 길을 나섰다. 화창한 태국의 날씨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들뜨게 했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어떤 현지인이 말을 걸었다. 우리는 후에 그를 *'꼰손딘'이라 부른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링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스트리트 파이터>의 달심을 연상케 하는 외모라 2년이 지난 지금도 꽤나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우리에게 영어로 무엇인가 설명했다. 우리는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겨우겨우 단어를 조합해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오늘은 태국의 하루뿐인 빅홀리데이야. 사원이 쉬는 날이지. 사원 말고 저쪽 강가에 사진 찍기 좋은 장소가 있어. 보트를 타고 구경할 수 있는 사원도 있는데 관광객이 가면 3000밧을 받지만, 우리는 친구니까 내가 1200밧에 탈 수 있는 곳을 알려줄게. 아주 큰 불상도 있고, 뚝뚝을 타고 가면 금방 가. 뚝뚝 요금은 30밧쯤 나올 거야.' 그는 아주 친절하게 종이에 지도와 사원을 그려가며 설명했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뚝뚝 한 대가 나타났다. 뚝뚝을 타고 가며 우리는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타이 스마일이구나. 태국 사람들 정말 착하구나. 오늘 봤는데 친구래! 바가지 안 쓰게 현지인 가는 곳을 알려주다니, 대박!'이라 했더라지.





사기꾼이 손수 그린 지도 / 뚝뚝 운전자도 한 패다. 나쁜 시키들

그렇다. 우리는 보기 좋게 당했다. 소액 사기쯤으로 명명해도 될까. 멍청하게도 보트를 타며 수상 가옥을 찍고, 동영상 촬영을 하고, 관광지라는데 영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어 보이는 사원에서 불상과 사진을 찍고, 내리는 곳에서 영문도 모른 체 또 통행료를 내고.... 뭣도 모르고 즐거웠다. 약 한 시간 정도는 말이다. 이상함을 눈치챈 건 그날 저녁 숙소에서였다. 우연히 '태사랑'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글을 보게 됐다. 그때서야 뒷골이 서늘해졌다. 아, 우리 당했구나. 여행 첫날이라 밧화 환율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는 1200밧이 태국 물가에서 얼마나 어이없는 가격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친구는 비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만 했단다. 친구야, 말을 했어야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2500밧이 있었지만 돈이 부족하다 말하고 2000밧에 탔다는 것.






관광객이라곤 보이지 않던 사원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의 불교용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인용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원효대사 해골물이다.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다는 이야기. 바로 이해가 가진 않았다. 원효대사야 자신의 부주의로 해골물을 마셨고, 딱히 피해를 본 일도 없으니 그냥 넘어간다 치지만, 나는 엄연히 피해를 당했는 걸? 순간 설풋 이해했다. 행복했으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지했기에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고, 몰랐을 땐 친절이, 아는 순간 사기가 되었지만. 잠깐! 이건 마음먹기에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알고, 모름의 문제다. '일체유심조'는 적절한 말이 아닌 거 같았다.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원효대사가 '내가 마신 건 해골물이 아니었다', 우리가 당한 일도 '그건 사기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고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원효는 해골에 괸 물을 마셨고, 우리는 사기를 당했다. 하지만 원효의 마른 목을 적셔준 것도 해골에 괸 물이 맞고, 우리가 행복했던 것도 그 사기 행각 때문에 일어난 일이 맞다. 여기서 불교의 교리를 따른다고, '목을 축였으니 됐고, 즐거웠으니 됐다. 해골물인 것도 사기인 것도 잊자'가 아니라, 나의 즐거웠던 마음과 이면으론 사기 행위이란 사실도 인정을 하고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배움 아닐까? 원효도 마음먹기 달렸다고 해골물이나 그냥 물이랑 똑같다며 해골물을 또 마시진 않았을 테니.





*꼰손딘: 태국어로 개새끼 정도의 욕으로 알고 있다. 카오산로드에서 사원이 몰려 있는 쪽으로 나가는 사거리 횡단보도에 혼자 있는 현지인을 조심하라. 우리가 당한 사기는 10여 년 전부터 유행한 아주 전통 있는 사기법이다. 카오산로드에서 며칠 묵었던 우리는 꼰손딘을 그 후로도 두어 번 정도 더 마주쳤으나 무서워 욕 한마디 못하고 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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