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휴먼 보이스> (2020)
1930년 파리 국립극장 코미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초연을 올린 「휴먼 보이스(La voix humaine)」는 장 콕토가 2년 전에 에디트 파이프를 위해 썼지만 거절당한 희곡으로, 5년간 사귀었으나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자 자신을 떠나려는 연인과 통화하는 한 젊은 여성의 독백을 그려냈다. 「휴먼 보이스」는 의사소통과 얽힌 인간 욕구와 실재에 관한 장 콕토의 실험적인 희곡이었을뿐더러, 예술사에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한 작품이다. 지안 카를로 메노티의 오페라 부파 「전화」(1947)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 <사랑>(1948)이 이에 해당하는 사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또한 장 콕토의 희곡에 매료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1970년에 안나 마냐니가 출연한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사랑>을 보고 나서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장 콕토의 희곡을 찾아 읽었고 깊이 감명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욕망의 법칙>(1987)에서 카르멘 마우라를 극 중 단막극 ‘휴먼 보이스’에 오르는 배우 티나로 설정하며 장 콕토를 향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더 나아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에서 「휴먼 보이스」를 다시 한번 본인의 영화 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콕토를 향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애정과 창작 욕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휴먼 보이스>(2020)는 동명 희곡 속 ‘버림받은 여자’라는 원형만 공유하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본인이 생각하는 여성상을 투영해 자유롭게 변용한 단편영화다. <휴먼 보이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떠난 연인과 함께 4년 동안 지냈던 집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여자(틸다 스윈튼)’가 있다. 사흘 동안 기다린 끝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여자’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떠난 연인은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위해 이별을 고하고,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는 감정의 곡선을 그리며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휴먼 보이스> 속 ‘여자’는 장 콕토의 희곡처럼 떠난 연인의 짐 가방 옆에 버려져 있으며, 혼이 빠져버린 듯한 사람처럼 고독과 우울감에 허덕인다. 심지어 영화와 연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휴먼 보이스>는 ‘여자’의 멜랑콜리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테라스 밖 풍경을 도심의 스카이라인 대신에 세트장 회색 내벽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휴먼 보이스> 속 ‘여자’는 장 콕토의 희곡 속 여성과 달리 절대로 수동적이지 않다. 사실 그의 영화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다양한 문제를 갖고 있지만, 자기가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음지에 빠진 삶을 양지로 끌어올리려고 주체적인 노력을 가한다. 게다가, 그의 여성 캐릭터들은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상대방보다 영리하게 행동한다. 이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언어로 정리하면, 그의 모든 여성 캐릭터는 도덕적인 자율성을 잃지 않으려는 존엄적인 개인이다. 단적인 예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서 오랜 연인에게 비대면으로 이별을 통보 당한 스타 성우 페파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3일 동안 연인을 찾기 위해 온갖 준비를 한다. 그리고 본인을 둘러싼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자기자신을 구원하고자 불타는 침대를 응시한다.
<휴먼 보이스>의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떠난 연인이 돌아오길 바라며 <킬 빌 – 1부>(2003), <킬 빌 – 2부>(2004), <재키>(2016), <팬텀 스레드>(2017)를 포함한 그동안 같이 본 영화 DVD 케이스를 정리정돈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의 평소 생활 스타일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질서를 엄격히 유지한다는 것은 점멸하는 사랑을 다시 지피기 위한 순종적인 태도다. 하지만, ‘여자’는 갑자기 도끼를 꺼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은 떠난 연인의 정장을 찍어 내리는데, 이는 떠난 연인을 향한 분노 표출인 동시에 순종적인 자기 모습을 부수는 자율적인 행위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독백이라는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여자’의 독백은 일반적인 독백과 다르다. 누구도 이 독백을 하나의 규칙으로 정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바라보는 ‘여자’의 독백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결론은 단 하나다. ‘여자’는 독백을 통해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고, 상대방에게 내줬던 도덕적 자율성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떠난 연인과 통화를 한 거라고 가정하면, ‘여자’는 거짓말과 진실, 순종과 분노 등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어가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온 전화가 주인공의 환상이라면, ‘여자’가 사흘 동안 참았던 속마음을 풀어내고 억눌렀던 감정을 배설함으로써 좌절되었던 욕구를 회복해 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여하튼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독백 덕분에 오히려 ‘여자’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층위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여자’는 본인의 삶을 재개할 수 있는 돌파구로 나아갈 발판을 직접 마련한다.
이뿐만 아니라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와 연극을 넘나드는 공간 구성, 그리고 다양한 카메라 워크와 다발적인 컷을 통해 도덕적 자율성과 존엄성을 회복해 가는 ‘여자’의 과정을 그려낸다. 전자의 경우, 영화와 연극의 공간을 굳이 나누지 않음으로써 막다른 길에 선 ‘여자’가 스스로 동선을 점차 확장하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후자의 경우도 전자와 일맥상통한다. 예를 들어,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수평 트래킹으로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그녀가 멈췄을 때 곧바로 버스트 숏으로 전환한다. 그다음 컷에서는 카메라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아래에서 위로 수직 이동하며 훑다가 다시 한번 버스트 숏으로 전환하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이전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수평 트래킹 숏을 진행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여자’를 다양한 이미지로 분할할 뿐만 아니라, 양극단의 심리적 상태에서 ‘여자’가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이끈다. 특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수평 트래킹 숏에서 카메라가 세트장 밖으로 나가는 문을 향한다는 점은 ‘여자’가 사랑에 종속되어 보지 못했던 현실 및 삶의 빛과 서서히 재회할 거라는 미래를 기대케 한다.
떠난 연인과의 통화가 갑자기 끊긴 종반부,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전에 ‘여자’는 4년간 지냈던 집 세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데, 때마침 떠난 연인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여자’는 그에게 짐 가방을 경비실에 맡겼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서 챙겨가도 괜찮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 부탁을 한다. ‘여자’는 떠난 연인에게 멀어도 괜찮으니 테라스로 나와서 오랫동안 동거했던 집을 바라봐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여자’는 지금 자기가 불에 타 죽어간다고 거짓말한다. 극 중에서 떠난 연인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정황상 불에 타오르는 예전 집을 보며 ‘여자’가 분신자살을 시도 중이라고 착각했을 테다. ‘여자’는 떠난 연인이 부른 소방관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여자’는 떠난 연인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영구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떠난 연인에게서 승리한 ‘여자’는 본인이 바라던 현실을 쟁취하게 되었고, 개 ‘대시’와 함께 환한 자연광을 만끽한다. 그리고 비로소 현실의 빛을 접한 ‘여자’는 사랑이 요구하는 수동성 때문에 오랜 기간 멈췄던 자기 삶을 직접 재개한다. 31분밖에 안 되는 단편영화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휴먼 보이스>는 해방과 자유의 가치를 창의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제고해내는 데 성공한다. 무엇보다 활활 타오르는 세트장을 뒤로 한 채 밖으로 걸어 나가는 도덕적인 자율성과 존엄성을 회복한 ‘여자’의 뒷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테다.